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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시 [투시] 투시력을 계발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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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2,650회 작성일 16-08-02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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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2556, Vote: 14, Date: 2006/01/06 12:26:02
글 제 목 [투시] 투시력을 계발하는 방법
작 성 자 문성호




제 9 장 

투시력을 계발하는 방법 




투시력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은 맨 먼저 이렇게 물어온다.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잠재되어 있는 능력이라면 내 경우에는 그것을 어떻게 개발할 수 있을까요?’ 

사실 그것을 개발하는 데에는 많은 방법이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권할 수 있는 안전한 방법은 단 한가지뿐이다.―이것은 맨 나중에 이야기할 것이다. 세계의 여러 미개한 나라들에서는 투시 상태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바람직하지 못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예컨대 인도의 비(非)아리안족 사이에서는 환각성 약물이나 담배가 사용되며, 수단의 마흐디(Mahdi, 회교 종말론의 메시아) 광신도들은 종교적인 광란의 춤 속에 휩싸여 돌아가다가 정신을 잃고 인사불성의 상태에 빠지며, 부두교의 끔찍한 교리를 믿는 추종자들은 흑마술의 혐오스러운 의식이나 무시무시한 제물을 사용하기도 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방법들이 성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도 이런 고대의 술법에 흥미를 가진 다수의 호사가들이 밝은 광점을 바라본다든가, 주문을 외운다든가 함으로써 반 마취상태를 이끌어내는 등의 자기최면을 사용하기도 한다. 또 그들 중의 일부는 인도의 호흡법을 사용하여 이와 비슷한 결과를 이끌어내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다. 

이 모든 방법들은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인들이 연습하기에는 매우 위험한 것들이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미지의 세계에서 벌이는 막연한 실험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 의해서 메스메리즘 상태에 들어가서 투시능력을 얻는 방법도 나로서는 극력 기피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메스메리저와 그 대상 사이에 절대적인 신뢰감과 애정이 없는 한 결코 시도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가슴과 영혼, 그리고 마음과 의도의 순수성과 완전성, 이런 것은 위대한 성자들에게서나 아니라면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메스메리즘적인 트랜스상태와 관련된 실험은 특히 회의론자들에게 투시의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를 제공하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방금 말한 것과 같은 조건―실현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에서가 아니라면,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그러한 실험의 대상이 되기를 권하지 않을 것이다. 

환자를 전혀 최면상태에 빠뜨리지 않고 통증이나 질병을 없앤다거나 손으로 환자에게 기를 보내주는 시도가 행해지는 메스메리즘적 의술은 이와는 전혀 다른 기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비록 매우 미숙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메스메리저가 건강하고, 또 그것을 순수한 의도로 행하기만 한다면 환자에게 어떤 해가 가해지는 일은 없다. 외과수술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에도 사람은 메스메리즘적인 트랜스상태까지도 무리 없이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섣불리 실험해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실제로 나는, 영광스럽게도 이 문제에 관해서 나의 의견을 물어오는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아직도 기이한 자연현상으로만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라면 먼저 그에 관한 모든 관계자료를 면밀히 검토해보기 전에는, 혹은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적당한 스승의 지도를 받기 전에는 결코 어떤 종류의 실험조사도 해보려 들지 말도록 강력하게 권고할 것이다. 

그러나 적당한 스승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스승을 자처하면서 고대의 신성한 비밀을 얼마에 전수해 주겠다든다, 두당 얼마를 내면 수시로 가입할 수 있는 ‘초능력 개발회’ 따위를 운영하고 있는 자들 중에서는 찾을 수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치밀한 훈련의 필요성―미숙한 투시자보다 숙달된 투시자가 가지는 엄청난 이점―을 많이 역설했지만 그것은 다시금 우리를 똑같은 이문으로 되돌려 놓는다. 즉, 이런 확실한 훈련을 어디서 받을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그러한 훈련은 유사 이래로 늘 발견되어 온 바로 그곳에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즉, 언제나 그랬듯이 지금도 인류 진화사의 이면에 서서 우리에게 신의 뜻을 밝혀주는 위대한 우주법칙의 지배하에서 인류를 인도하고 도와주고 있는 대사들의 위대한 백색형제단(Great White Brotherhood of Adepts)이다. 

그렇지만 그들을 대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지혜에 목말라 하는 구도자가 가르침을 구하는 자신의 소망을 그들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이 역시 답은 오직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방법뿐이다. 이 가르침의 제자가 되는데에는 고생 없이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비결 같은 것은 없다. 거기서 얻어야 할 배움에는 왕도가 없는 것이다. 아득한 고대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자는 자기계발이라는 멀고도 험난한 길에 올라서야만 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서 바람직한 형태의 모든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수행의 단계들에는 비밀이랄 것이 전혀 없다. 나는 『보이지 않는 원조자』라는 책 속에서 이에 대해 상세히 서술해 놓았다. 그러므로 그것을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쉬운 길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누구나가 조만간에 가야 할 길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진화의 법칙은 인간을 그 목표를 향하여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대사들은 이 길을 매진하는 사람들 중에서 제자를 택한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스스로 배울 자격을 갖춤으로써만 자신을 배움의 길에 올려놓을 수 있다. 그러한 자격을 갖추지 않고서는 단순히 어떤 단체나 모임의 일원이 된다고 해서 그것이 그를 목표에 조금이라도 접근시켜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사실 신지학회는 이 대사들 중의 몇몇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몇몇의 사람들이 그들과 좀더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선택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단순히 회원의 자격이라든가 신지학회 내의 누군가와의 친분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사람의 진지성에 달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만이 절대 안전하게 투시력을 계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혼신의 에너지로 정신적 진화의 길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 중의 일정한 단계에서 고차원의 여러 가지 능력이 저절로 발현되는 것이다. 모든 종교들이 한결같이 권하는 한 가지 수행법이 있다. 이것은 주의 깊고 경건하게 받아들이면 어떤 사람에게도 해가 없으며, 이를 통해서 매우 순수한 형태의 투시력을 개발한 예도 있다. 그것은 바로 명상수행법이다. 

매일 일정한 시간―밤시간보다는 낮시간이 좋지만 조용하고 방해가 없는 시간―을 택하여 수분 동안 마음을 일체의 세속적인 잡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그것이 성공하면 자신의 온 존재의 힘을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영적 이상을 향해 불어넣는다. 그는 상념을 완전히 제어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매우 어려움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것을 성취하면 모든 면에서 이보다 자신에게 유익한 일은 없다. 그리고 상념을 더욱 더 집중시키고 고양시켜 갈수록 그는 점차 눈앞에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러한 명상을 만족스럽게 성취하기 위한 예비훈련으로서는, 일상생활사 속에서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모든 집중력을 기울이도록 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만일 편지를 쓴다면 그 일이 끝날 때까지 편지 쓰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도록 한다. 책을 읽을 때에는 결코 상념이 저자가 표현하는 뜻에서 벗어나 잡념 속에 방황하지 않도록 경계한다. 항상 마음을 놓치지 않고 저급한 열정뿐만 아니라 마음 자체를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상념을 제어할 수 있도록 끈기 있게 노력해야 하며 자신이 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항상 정확히 인식하고 있음으로써, 마치 무사가 자신의 검을 마음먹은 방향으로 겨누듯이 마음을 사용하여 그것의 방향을 의지대로 돌리거나 가만히 붙잡고 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투시능력을 아무리 갈구하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루, 혹은 한 시간만이라도 일시적으로 그 능력을 맛본다면 결국 그가 그것을 계속 유지하기를 원하게 될지는 결코 알 수가 없다. 그것이 그들에게 새로운 배움의 세계를 열어주며 유용한 새로운 능력을 부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두 번째의 이유로 해서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느낀다. 그러나 자신의 의무로 해서 아직도 세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결코 순전히 축복만은 아니다. 슬픔과 고통, 죄악과 속된 욕심이 영원한 짐처럼 환시가 열린 사람을 압박해오며, 지혜가 열리기 전까지는 쉴러의 다음과 같은 간절한 탄원에 자주 공감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왜 저를 영원한 암흑의 도시에다 던져놓으셨나이까? 열린 감각으로써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라구요? 위협해오는 암흑을 지척에 두고 장막을 조금 걷어 올리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됩니까? 무지만이 생명이요, 이 지식은 죽음입니다. 이 비탄스럽도록 밝은 눈을 되앗아가소서. 제 눈에서 이 잔인한 광명을 거두어 가소서. 당신의 진리를 전하는 육신의 통로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합니다.” 그리고 뒤에서 그는 다시 이렇게 외친다. “암흑을 돌려주소서. 행복한 내 감각의 암흑을. 당신의 끔찍한 선물일랑 거두어가 주소서!” 

그러나 물론 이것은 일시적인 느낌이다. 고차원의 투시력은 곧 수행자에게 슬픔을 초월한 무엇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상의 모습이 그 무엇을 가리키는 듯이 보이든 간에 만물은 의심의 여지없이 만인의 궁극적인 선을 위해서 어울려 작용한다는 확신이 그의 영혼을 압도한다. 그는 자신이 인식하든 않든 간에 죄악과 고통은 존재하며, 그가 그것을 볼 수 있게 되면 결과적으로 암흑 속에서 일할 때보다도 더 효과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리하여 그는 점차 이 세계의 무거운 카르마 중에서 자신의 몫을 지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 고차원의 능력을 운 좋게 약간 맛본 빗나간 일부 인간들이 있지만 그들은 그것을 지극히 비열한 목적에 사용하는 데에 대해서 일말의 거리낌도 느끼지 않는다. 실제로 심지어는 자신을 ‘시험이나 사업 투시가’라고 선전까지 해댄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그가 불행히도 그 능력이 빚어내는 긴장을 견뎌낼 만큼 정신적으로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지니게 되었음을 보여줄 뿐, 능력을 그렇게 사용하는 것은 그것을 타락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행위가 만들어내는 엄청난 악업을 깨닫게 되면 신성을 더럽히는 그런 불행한 자들에 대한 미움은 이내 연민으로 변한다. 

투시력은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며 다른 사람의 비밀을 무한정 캐고들 수 있게 한다는 부정적인 견해가 종종 제기된다. 물론 그러한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실질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생각은 한갓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반대는 ‘시험이나 사업 투시가들’의 지극히 부분적인 능력에 관한 한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서 완전한 능력을 얻은 사람들에 대해서 그런 견해를 제기하는 사람은 세 가지 기본적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첫째, 진정한 투시력이 펼쳐 보여주는 황홀한 세계를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 개개인의 하찮은 사생활을 엿보고 싶어하는 생각을 눈꼽만치라도 가질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둘째, 행여 어떤 불가능한 이유로 투시자가 그런 하찮은 뒷소문에 속된 호기심을 품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차원에서도 여기서처럼 신사의 명예와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 욕심을 채우려는 생각을 가로막아 줄 것이다. 셋째, 우리가 알 수 없는 가능성에 의해서 앞의 고려가 먹혀들지 않는 어떤 종류의 저급한 피트리(Pitri)를 만난 경우에는 모든 학생들에게는 능력의 어떤 징조를 발견하는 즉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한 완전한 지침이 항상 주어진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러한 제한들은 곧 남을 엿본다든가 능력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한다든가 신비현상을 과시하는 일과 같은 것이 없으리라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물질계에서 올바른 도덕관념을 지닌 사람의 행위를 지배하는 것과 동일한 사고가 아스트럴계와 멘탈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수행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지식이 부여해준 능력을 자신의 세속적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영적인 모임에서 ‘시험’이라고 부르는 것에 결코 응하지 않을 것이다. 즉, 물질계의 회의론자들의 눈에는 기이한 힘으로 보이는 것을 자신이 지니고 있음을 명백히 증명할 일은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들 말한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무엇인가? 그에게는 회의론자들을 논박하고 확신시켜주기란 어렵잖은 일일테고 게다가 그것은 그들에게도 좋은 일일텐데 말이다!’ 이러한 비판은 첫째,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누구도 회의론자들을 논박하거나 확신시키려고 <안달하지> 않으며, 그들의 태도에 대해서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못한 것이며 둘째, 사람들은 회의론자들이 예컨대 한방의 주먹에 나가떨어지듯이 갑자기 기이한 현상을 마주치는 것보다는 그것을 지적으로 차근차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더 나은 것인지를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러해 전에 신네트 씨의 『신비세계(Occult World)』라는 책 속에서 충분히 논의되었으며 거기에 제시된 것을 여기서 새삼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 주변의 일부 사람들에게는 지상의 대다수 어리석은 사람들의 삶을 차지하고 있는 실없는 뒷공론과 나태한 호기심이 수행자의 좀더 현실적인 삶 속에서는 발붙일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가 매우 힘든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책상 위에 놓여있는 다른 사람의 편지에 문득 눈이 가듯이 투시자는 다른 사람이 감추려고 하는 비밀을 우연히 보는 수가 있는지를 가끔 물어온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랬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없다.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곧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예 보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일 반대자들이 어떤 수행자도 누군가를 도와주어야 할 때 외에는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에게는 항상 돌보아야 할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일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숙달된 투시자들의 폭넓은 삶의 사실들을 이해하는 것도 그렇게 절망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매우 많은 경우에,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수행자가 알고 있으리라는 것은 수행자들에게 가해지는 제한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한 작은 부분에 비추어보더라도 자명하다. 위대한 지혜의 대사들 자신의 훨씬 더 광역한 감각에 있어서는 그것은 물론 사실이며 그들을 가끔 만나는 특권을 지닌 사람들이 직접적인 가르침과는 사뭇 동떨어진 사소한 한마디의 말씀에도 그토록 존경심을 보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왜냐하면 어떤 내용의 이야기일지라도 대사의 말씀은, 혹은 심지어 그의 높은 제자의 말씀도 그 정확성에 있어서 우리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사의 경지와 큰 능력은 사실 모든 인류의 유산이다. 우리가 지금은 그 위대한 능력과 거리가 멀다고 하지만 언젠가는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인류 전체가 고차원의 투시력을 지닌다면 이 구태의연한 세계는 어떻게 변모할까! 모든 사람이 기록을 읽을 수가 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될 것이며, 현재 이론으로만 알고 있는 모든 과정들을 관찰할 수가 있다면 과학은 어떻게 변화할 것이며, 의사도 환자도 진행되고 있는 모든 일을 정확히, 분명히 볼 수 있다면 의학은 어떻게 될 것이며, 모든 사람이 진리를 폭넓게 파악함으로써 더 이상 그 근거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없어진다면 철학은 어떻게 될 것이며, 모든 인간이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만 종사함으로써 모든 일이 기쁨이 된다면 노동은 또 어떻게 되며, 모든 아이들이 그들의 인격 형성을 위해 애쓰는 선생님들에게 마음과 가슴을 열어놓고 있다면 교육은 또 어떻게 될 것이며, 사후의 세계와 우주를 지배하는 위대한 법칙에 관한 진리가 모든 사람의 눈앞에 열려 있어서 더 이상 그 다양한 교리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여지가 없어진다면 종교는 또 어떻게 되겠는지를 생각해 보라.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진하된 인간들이 그처럼 훨씬 더 자유로운 조건하에서 서로를 돕는 것은 얼마나 더 용이하겠는가! 우리의 앞에 열리는 가능성은 사방으로 찬란히 펼쳐진 조망과도 같아서 우리의 7주기(Seventh Round)는 진정한 황금기가 될 것이다. 모든 인류가 지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훨씬 더 높은 차원으로 진화하기 전에는 이런 위대한 능력들을 지닐 수 없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처럼 진화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위대한 아틀란티스 문명의 끔찍한 멸망을 그보다 훨씬 더 나쁜 조건 속에서 고스란히 답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틀란티스인들은 능력이 커지는 것은 곧 책임도 동시에 무거워지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도 대부분 그들 중의 일원이었다. 우리가 그 실패로부터 지혜를 얻었기를, 그리고 다시금 삶의 더 큰 가능성이 우리 앞에 열릴 때 이번에는 그 시련을 좀 더 잘 견뎌낼 수 있기를 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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