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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시 [투시] 시간투시 -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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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2,571회 작성일 16-08-0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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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212, Vote: 18, Date: 2005/10/20 23:26:33
글 제 목 [투시] 시간투시 - 미래
작 성 자 문성호 




제 8 장 

시간투시 - 미래 





충분히 의식이 고양된 사람에게는 과거의 모든 사건들이 한꺼번에 생생하게 펼쳐진다는 것은 어렴풋이나마 상상할 수 있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의식을 지닌 사람 앞에 미래 또한 한눈에 펼쳐지는 이치를 이해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렵다. 우리가 만일 운명에 관한 회교의 교리나 캘빈주의자들의 예정론을 믿는다면 그런 개념은 이해하기가 전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이들은 모두 진리를 왜곡한 것이므로 우리는 좀더 개연성 있는 가설을 찾아보아야 한다. 



아직도 예지능력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단지 그 방면의 증거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신빙성 있는 많은 사례들이 이러한 사실을 의심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드물 정도로 논리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 에고가 어느 정도의 예지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예지된 사건이 언제나 매우 의미심장한 것뿐이라면 그것은 그 에고가 본 것의 인상을 자신의 육체 속에 있는 저차원 인격 위에 뚜렷이 남겨놓기 위해서 어떤 비상한 자극(힘)이 내부에서 일어나 일시적으로 그에게 능력을 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죽음이나 심각한 재난이 예지된 많은 경우에 이것은 그 설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기록된 사례들 중에는 예지된 사건이 너무나 사소하고 하찮은 내용이어서 이로써는 설명이 안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잘 알려진 스코틀랜드의 제2의 투시안에 관한 이야기는 그 좋은 예이다. 신비현상을 믿지 않는 어떤 사람이 하이랜드에 사는 어떤 투시능력자로부터 이웃사람의 죽음에 대한 경고를 받았다. 그의 예언은 매우 자세한 내용이었으며 장례식 광경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거기에 참석할 사람들과 관을 옮기게 될 네 사람의 이름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말을 들은 그 사람은 콧방귀를 뀌며 비웃어버리고는 금방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그러나 예언된 바로 그 날짜에 이웃사람이 죽자 그 경고가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관을 옮기는 일을 맡음으로써 그의 예언이 빗나가게 만들어보이겠노라고 결심했다. 그는 일단 자신의 의도대로 일을 주선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막상 장례행렬이 출발하려는 순간에 그는 어떤 사소한 일 때문에 잠시 일이 분쯤 자리를 비웠다. 그가 서둘러 돌아와 보니 놀랍게도 행렬은 그를 놔두고 이미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 예언은 정확하게 실현되었다. 관을 든 네 사람은 정확히 그가 예언한 네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무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을 매우 하찮은 일이 수개월 전에 분명하게 예언되었고 한 사람이 단호한 결심으로 그 예언된 내용을 바꾸어보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을 한 치도 바꾸어놓지 못한다. ―이것은 분명 세세한 일까지도 다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예정론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로부터 헤어 나올 방법은 이 문제를 좀더 높은 차원에서 내려다볼 때에만 찾을 수 있다. 물론 내가 앞장에서 말했듯이 이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아직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의 지식이 현재보다도 무한히 더 많이 쌓이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럴 것이다. 현재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다만 그러한 설명이 풀릴 수 있는 실마리를 잡는 것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은 과거에 발생한 원인에 의한 결과이듯이 장차 일어날 일은 이미 작용하고 있는 원인의 결말일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지상에서도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리라는 것쯤은 헤아려볼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계산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요인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빗나갈 가능성을 늘 안고 있다. 그러나 의식을 멘탈계까지 고양시킨다면 우리는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훨씬 더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무심코 뱉은 한마디가 그 말을 들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점점 확산되어 다른 많은 사람에게, 급기야는 온 나라에 퍼지는 것을 추적해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광경을 한번 목격하는 것이야말로 생각과 언행의 절제를 강조하는 정신적 교훈을 백번 듣는 것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이다. 멘탈계에서는 모든 행위의 결과를 완전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다른 행위의 결과가 어디서 어떻게 개입되어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인지도 알 수 있다. 사실, 현재 작용하고 있는 모든 원인의 결과는 뚜렷이 내다볼 수 있다. 즉, 전혀 새로운 원인이 발생하지 않는 한 실현될 미래상이 우리의 눈앞에 공개되어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원인은 발생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이 사용할 자유의지는 상당한 정확도를 가지고 사전에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보통의 인간은 진정한 의미의 의지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는 많은 의미에서 상황의 산물이다. 그의 전생의 행위는 그를 어떤 특수한 상황 속에다 데려다 놓으며, 그 상황은 그의 인생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인자(원인)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의 장래는 거의 산술적인 정확도로써 예측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된 인간의 경우에는 경우가 달라진다. 그에게도 역시 인생의 중요한 사건들은 과거의 업보에 근거해서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작용하는 방식은, 즉 그가 그것을 대하는 방식과, 필경에는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그것은 멘탈계에서조차도 단지 확률적인 가능성으로 밖에는 예측할 수 없다. 



이렇게 인간의 삶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오직 그의 인생여정의 어떤 위기상황에서만 사용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는 인생에서 두세 가지의 분명한 선택만이 그의 앞에 놓여있는 어떤 시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가 그 중의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전적으로 그의 자유이다. 그리고 그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그가 어느 쪽을 택하리라는 것을 거의 확실히 감지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그러한 지식은 어떤 의미에서도 그 선택에 압력을 주는 요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그가 선택을 한 후에는 그는 그것을 따라가고 그 결말을 보아야만 한다. 많은 경우에 어떤 길에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그로부터 다시 방향을 돌릴 기회를 만나기까지는 먼 길을 가야만하게 된다. 그의 처지는 열차조종사의 처지와 비슷하다. 갈림길을 만나면 조종사는 어느 선로로 갈 것인지를 자신이 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일단 그 중의 한 선로에 들어선 다음에는 그는 새로운 선택권이 주어질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날 때까지 자신이 택한 선로 위를 달려야 한다.



멘탈계에서 내려다보면 이 새로운 분기점들은 뚜렷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각각의 선택에 대하여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틀림없이 이루어질 모든 결과가 눈앞에 훤히 보인다. 불확실하게 남아있는 유일한 것은 그가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중차대한 문제이다. 사실상 우리는 단 하나가 아니라 몇 가지의 짜여진 미래를 볼 것이며 그 중의 어느 것이 현실로서 실현될 것인지는 반드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 주저 없이 대뜸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강한 가능성을 발견할 수는 있을 것이지만 내가 이야기한 경우와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이론적으로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지식만으로도 우리는 정확하게 많은 예측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능력이 있다면 그 각각의 선택이 어떻게 택해질 것인지를 언제나 예측할 수 있으므로 절대적인 확률로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붓디계에서는 의식적인 계산과 같은 힘든 과정은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전에 말한 바와 같이 그곳은 이 지상에서는 도무지 설명이 불가능한 어떤 방식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원인은 이 차원계의 속성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로서는 이 사실을 다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고차원의 능력이 작용하는 이치는 육신의 머리로는 본시 이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렴풋이나마 우리를 그에 대한 이해에 조금이라도 접근시켜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단서를 간혹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한 단서 중의 하나가 올리버 롯지 경이 카디프에서 열린 영국협회에서 행한 연설 속에 담겨 있다. 



“시간이란 사물을 바라보는 한 가지 상대적인 방식일 뿐이라는 생각은 영감적이고 유용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자연현상 속을 어떤 일정한 속도로 지나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주관적인 진행을 객관적인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사건이 꼭 이러한 순서와 저러한 정확한 속도로 진행되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건을 바라보는 한 가지 방식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건은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늘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며 또 사건이란 일어나는 그것이 아니라, 그것과 마주쳐 지나가는 우리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기차 안에서 여행을 하는 사람을 비유해본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만일 그가 기차에서 영원히 내릴 수 없고 기차의 속도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마도 경치란 의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그것이 동시에 한꺼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가차 없이 흐르는 성질이 다름 아니라 우리가 현재 지니고 있는 한계의 본질적 일부분인지도 모를 시간에 대해서 4차원적인 성질이 존재할 가능성을 헤아려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일단 이해하면 그것이 현재의 모든 행위를 지배할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해져있고 예상되는 궁극을 향해서 의식적으로 쫓아가는 존재들의 행위와 (만물의) 전개형태를 결정하는 예정론과 관련을 지어서 생각할 때에, 우리가 우리의 내적인 (영혼의) 힘에 의해서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고차원계’, 혹은 사물의 총체성(일체성)을 그러한 과거와 미래는 함께 형성하고 있을 가능성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시간은 결코 네 번째의 차원이 아니다. 그러나 당분간 그것을 그러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불가해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다. 원뿔의 뾰족한 끝으로 종이를 관통해서 그것을 완전히 통과시킨다고 생각해보자. 종이 위에 사는 미생물은 그 종이의 표면을 떠난 외부의 어떤 것도 상상하지 못하므로 그 뿔의 전체적인 모습을 결코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런 모양의 물체를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작은 동그라미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신기하게도 갈수록 점점 더 커지다가 불가사의하게도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뿔의 일련의 단면들인 것이 미생물에게는 점점 크기가 변하는 동그라미의 일생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미생물로서는 그 연속적인 과정이 한눈에 파악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다. 그것을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내려다봄으로써 원뿔은 항상 하나의 전체로서 존재하며 그 미생물은 단지 자신의 한계로 인한 미망에 빠져 있을 뿐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우리의 미망도 이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떤 사건의 과정을 붓디계에서 내려다보는 시각은 원뿔을 전체적으로 조감하는 시각과 일치한다. 물론 이러한 발상을 전개하려는 모든 시도는 우리를 일련의 놀라운 역설에 부딪히게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사실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지혜가 밝아지는 때가 오면 우리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수행자의 의식이 붓디계에서 완전히 각성되어 완전한 미래투시가 가능해진다고 해도 그는 그 투시의 전체적인 시말을 일목요연하게 밝히지는 못할지도, 아니 결코 못할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그가 그 능력을 발휘하든 않든 간에 그는 상당한 정도의 명확한 미래투시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 능력을 구사하지 않고 있을 때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문득문득 미래의 환시가 보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종종 어떤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순간적으로 통찰하게 된다. 



앞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처럼 완벽한 미래투시의 경우는 흔하지 않으며 모든 다양한 단계의 투시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는 투시라고 할 수도 없는 돌발적인 희미한 예감으로부터, 종종 일어나며 제법 완전한 제2의 투시안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약간 현혹적인 이름이 붙여진 이 나중 형태의 능력은 지극히 흥미로운 것으로서 이제까지의 것들보다 더 주의 깊고 체계적인 연구를 기울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이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 능력은 스코틀랜드의 고지인(高地人)들 사이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발견되는 것이지만 예외 없이 산악민이나 외딴 생활을 하는 종족에게서 가장 흔하다. 그것은 우리 영국인 중에서는 켈트족의 고유한 속성인 것처럼 말해지곤 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전 세계의 그와 비슷한 환경에 처한 민족에게서 나타난다. 예컨대 그것은 웨스트팔리아의 농부들 사이에서 매우 흔하다고 한다. 



가끔 제2의 투시안은 일어날 사건을 뚜렷이 보여주는 장면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보다 더 흔한 것은 어떤 상징적인 장면을 통해서 미래가 희미하게 예시되는 것일 것이다. 예시되는 사건들은 예외 없이 유쾌하지 못한 내용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 하다. 그 중에서도 죽음이 가장 흔하다. 나는 제2의 투시안이 지극히 음울한 내용을 보여주지 않았던 예를 기억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그것의 독특한 소름끼치는 상징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수의와 관 곁에 켜놓는 촛불과, 기타 장례식의 으시으시한 일들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은 어느 정도 지방성을 띤다. 스키에 섬에 사는 주민들은 단지 육지로 나가기만 해도 일단 섬을 떠나면 그러한 능력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또 그러한 능력은 어떤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적인 것인 경우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한 가문을 통틀어서 유독 한 사람만이 그런 능력을 지녔고 다른 사람들은 그 우울한 영향력으로부터 거리가 먼 경우가 종종 발견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 수개월 전에 제2의 투시안에 의해 정확히 예지된 한 가지 사례를 앞서 이야기한 바 있다. 여기 그보다 더 놀라운 예가 있다. 이것은 이야기 속의 한 인물이 나에게 일러준 그대로의 내용이다. 




우리는 정글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별다른 성과도 없이 한 시간쯤을 걸었다. 

그때 마침 내 곁에 있던 카메론이 갑자기 파랗게 질린 채 발을 멈추고 자신의 바로 앞쪽을 가리키며 공포의 비명을 질렀다. 

“봐, 저것 좀 봐! 맙소사, 저기 좀 봐!” 

“어디, 어디? 뭘 말이야?” 우리는 평소에 침착한 우리의 친구를 그토록 놀라게 할 정도라면 호랑이나 코브라와 같은 뭔가 끔찍한 것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고 모두 그의 곁으로 뛰어가 주위를 둘러보며 어리둥절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호랑이도, 코브라도 보이지 않았다. 카메론은 단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가리키면서 공포에 질린 창백한 얼굴로 그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카메론, 카메론!” 내가 그의 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말 좀 해보게, 무슨 일이냐구?” 

내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낮은 톤의 몹시 기이한 소리가 나의 귀를 울렸다. 그리고 카메론은 가리키던 손을 떨어뜨리며 긴장되고 쉰 목소리로 “저봐! 들었지? 휴우- 이젠 끝났어!”하고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의 목을 느슨하게 풀어놓고 다행히 내 물통에 약간 남아 있던 물을 얼굴에 뿌려주는 동안 다른 사람은 그의 악다문 이빨 사이로 브랜디를 흘려 넣었다. 잠시 혼란이 지나가고 나는 내 옆에 있었던 동료(그는 우리 중에서도 가장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에게 속삭였다. “뷰챔프, 자네도 무슨 소리를 들었었나?” 

“그럼, 들었지. 몹시 괴이한 소리였어. 뭔가가 부서지는 소린지, 덜컹거리는 소리 같았네.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지만 아주 분명했네. 전혀 엉뚱한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이 소총끼리 덜걱거리며 부딪히는 소리였다고 맹세할 수 있었을걸세.” 

“내가 받은 인상하고 똑같군,” 내가 중얼거렸다. “가만, 그가 깨어나고 있어!” 일이 분쯤 지나자 그는 겨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감사하고 말썽을 일으킨 것을 미안해했다. 그리고 곧 일어나서 나무둥치에 기대어 앉아서는 나지막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게 친구들, 내가 기이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할 책임이 느껴지네. 이런 이야기는 될 수록 피하려고 했었지만 언젠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고 지금이 바로 그때인가보네. 우리가 함께 여행하는 동안 꿈이나 환상, 어떤 징조 따위에 대해서 자네들이 모두 한갓 비웃음거리로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그저 잠자코 아무런 말도 하려들지 않았던 것을 자네들도 기억할지 모르겠네. 나는 나 자신의 무서운 경험을 통해서 사람들이 초자연의 세계라고 이름붙인 그 세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세계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세계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네들의 말에 찬동할 수가 없었고 그것을 비웃거나 논란을 일삼는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세. 달리 말하자면, 나는 우리 지방의 많은 사람들처럼 제2의 투시안, 즉 재앙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그것을 환시 속에서 예지하는 끔찍한 능력을 지니는 저주를 받은 것이라네.” 

“내가 방금 본 것과 같은 환시와 그 끔찍한 공포가 나를 이처럼 변화시켜놓은 것이야. 나는 눈앞에 어떤 끔찍한 사고로 죽은 송장을 보았다네. 얼굴이 부어오르고 뭉개어져 있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소름끼치는 살덩어리를 말일세. 나는 이 소름끼치는 시체가 관 속에 놓여 있고 그 위에서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네. 그 장소와 목사도 보았지만 전에 본 기억은 없었어. 나는 지금도 그 모든 것을 마음속에서 생생히 그려낼 수 있다네. 나는 뷰챔프 자네와 나와 우리 모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조문객으로 둘러서 있는 것을 보았고 장례식이 끝난 후 군인들이 거총하는 것을 보았네. 그리고 그들이 쏜 예포 소리를 들었지. 그 다음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지 못하네.” 

그가 예포 소리에 대해서 말할 때 나는 전율을 느끼면서 뷰챔프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 잘생긴 회의론자의 공포에 질린 얼음장 같은 얼굴은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심령경험의 한 예(그리고 결코 그 대표적인 예라고는 할 수가 없는)일 뿐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우리는 단지 그 속에 나오는 제2의 투시안의 예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나는 다만 그날 오후 그 젊은 군인들이 그들의 지휘자를 카메론 씨가 묘사한 것과 같은 참혹한 상태로 발견했다는 사실만 밝혀둔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다음날 저녁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한 후 이 우울한 내용의 조서는 당국에 의해 작성되었다. 카메론과 나는 우리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 우울한 기분을 부드러운 자연의 손길에 힘입어 떨쳐보려고 산책을 나갔다. 갑자기 그가 나의 팔을 껴안고 조잡하게 쳐놓은 울타리 사이를 가리키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 저기야! 저곳이 내가 어제 보았던 그 장소라네!” 그리고 나중에 그 부대의 목사님과 인사를 하게 되었을 때 나는, 다른 친구들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카메론이 전율에 사로잡혀 떨리는 손으로 그와 악수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그 환시 속의 목사를 만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신비현상의 원리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나는 카메론 씨의 환시는 제2의 투시안의 순수한 예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사람들은 듣지 못했으나 그와 매우 가까이 있었던 두 사람은(그 중 한 사람은 확실히 ―아마 두 사람 모두일지도 모르지만― 그를 실제로 접촉했다) 제한적으로 그 속에 끼어들어 마지막의 예포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은 그 환시가 투시자에게 준 인상이 매우 강하여 그의 심체(Mind-body)를 진동시킴으로써 그것이 일반적인 상념전달의 경우처럼 그와 접촉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머지 이야기를 읽어보고자 하는 독자들은 『루시퍼』 제20권의 457페이지를 찾아보라. 



이와 비슷한 성격의 몇 가지 예들은 쉽사리 수집할 수가 있다. 이 투시에 나오는 상징의 종류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을 볼 때 그에게 수의가 둘러져 있는 것이 환시되면 그것은 분명히 그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질병이 다가오고 있는 날짜는 수의가 몸을 덮고 있는 정도나 그 환시(조잡한 상태의 투시를 의미함)가 보인 날의 시간 속에 암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이 이른 아침이라면 그 사람은 같은 날에 죽을 것이며 그것이 저녁에 보였다면 일년 내내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제2의 투시안의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상징적 형태는, 죽음을 예고 받은 사람의 머리 없는 유령이 투시자에게 나타나는 경우이다. 이런 형태의 한 예는 『죽음의 징조(Signs before Death)』라는 책 속에서 페리에 박사의 가족에게 일어난 대로 이야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나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 환시는 죽음의 순간, 혹은 죽음이 매우 가까웠을 때에야 일어났다. 



언제든지 마음대로 환시가 나타나게 할 수는 없더라도 어느 정도의 능력을 고정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투시자들로부터 눈을 돌리면, 고정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간발적인 미래환시의 예들을 많이 대할 수 있다. 깨어있는 중에 환시하는 예도 적지는 않으나 아마도 그 대부분은 꿈속에서 나타나는 것일 것이다. 때로 미래환시는 에고가 어려움을 무릅쓰고 (육체 속에 있는 낮은 차원의 에고에게) 그 인상을 각인시키는 것이 정당화될 정도로 투시자에게 매우 중대한 사건을 예고해주기도 한다. 이밖의 경우는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는 내용이거나, 아니면 그것을 보는 사람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용들이다. 에고(혹은 무엇이든 간에 대화를 걸어오는 존재)의 의도가, 저차원의 자아에게 어떤 재앙의 도래를 경고함으로써 그것을 예방하거나,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그에 대비함으로써 충격을 최소화시키려는 것임이 분명한 경우가 가끔 있다. 



이런 방식으로 가장 흔히 예시되는 사건은 물론 죽음―때로는 투시자 자신의 죽음, 때로는 그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다. 이런 형태의 미래투시는 관련 문헌 속에서 가장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며 그 목적은 분명하여서 그 예를 새삼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정도다. 예언적인 투시의 내용이 덜 우울한 것이면서도 매우 유용한 것이었던 한두 가지의 예를 들어보는 것도 독자들에게는 흥미가 있을 것이다. 다음은 신비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보고와도 같은 크로우 부인의 책 『자연계의 이면(Night Side of Nature)』 72페이지에서 발췌된 내용이다. 




몇 해 전에 지금은 글래스고에 살고 잇는 왓슨 박사가 그가 살고 있는 곳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으로 왕진을 가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연락을 받고 말에 올라 길을 떠났는데 어느 목초지를 지나던 중 황소 한 마리가 그를 보고 사납게 덤벼들었다. 그는 황소의 뿔을 가까스로 피해 달아나서 황소가 접근할 수 없는 한 곳에 몸을 피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목격한 어떤 사람들이 와서 그를 구해주기까지 오랫동안 그곳에 갇힌 채 기다려야 했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있는데 왕진을 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는 묘한 우연의 일치(그는 그렇게 생각했다)에 웃음을 지으면서 말에 올라 길을 떠났다. 그는 그가 지나야 할 길에 대해서는 전혀 무신경했지만 아닌게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목초지로 다가가 마침내 그곳에 당도했고, 그때서야 그는 그것이 꿈에서 본 곳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내 황소가 모습을 나타냈고 전속력으로 그를 향해 돌진해왔다. 그러나 그의 꿈은 그에게 몸을 피할 곳을 알려주었었고 그는 곧 그곳을 발견하여 몸을 숨기고 거기서 황소에게 갇힌 채 마을사람들이 그를 구해줄 때까지 서너 시간을 보냈다. 왓슨 박사는 그 꿈이 아니었다면 어느 방향으로 도망쳐서 몸을 숨겨야 했을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했다. 




다른 한 경우는 예언으로부터 그것이 실현되기까지 훨씬 더 긴 시간의 간격을 두고 있으며, 그것은 F. G. 리 박사의 『초자연현상의 일별(Glimpses of the Supernatural)』 제1권 240페이지에 나와 있다. 




옥스퍼드샤이어 지방 농촌가정의 주부인 한나 그린 부인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그녀가 어느 일요일 저녁에 혼자 집에 남아있는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보니 병색이 있는 절름발이가 손에 곤봉을 들고 집안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했다. 그녀는 그를 막으려고 한동안 애를 썼지만 막아내지 못하고 그가 휘두른 곤봉을 맞고 실신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리하여 그는 집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그녀는 꿈을 깼다. 

오랜 시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일도 없었기 때문에 그 꿈에 보였던 상황은 이내 잊혀져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그것은 기억 속에서 까맣게 지워져버렸다. 그러나 그 후 7년이 지나서 이 주부는 켄싱턴에 있는 외딴집(그 가족이 후에 와서 살게 된 마을집)을 다른 두 사람의 하인과 함께 관리하게 되었다. 어느 일요일 저녁, 다른 하인들이 외출하고 그녀 혼자 남아있을 때 갑자기 현관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별안간 옛날에 꾸었던 그 꿈이 생생하게 그녀의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그녀는 자신이 오로지 혼자인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곧 거실 테이블 위의 램프에 불을 켜고는 ―그동안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는 더욱 커졌다― 경계심을 잃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가서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놀라 까무러치게도 거기에는 수년 전에 꿈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 이제는 육신을 입고 곤봉을 든 채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 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정신을 바싹 차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현관문과 다른 문, 그리고 창문들을 더욱 더 굳게 단속했다. 그리고는 집안에 있는 온갖 종들을 요란스럽게 울리면서 위층 방의 불들을 모두 켰다. 이 때문에 침입자는 겁을 먹고 결국은 물러가버렸다. 




이 경우에도 분명히 꿈이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 꿈이 아니었다면 그 무고한 주부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습관적인 버릇으로 평소처럼 그냥 문을 열어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고가 자신의 저급한 자아에게 알려주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의 인상을 낮은 자아에게 전해주는 것은 오직 꿈을 통해서만은 아니다. 그 예는 책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겠으나, 나는 책을 인용하는 대신 불과 몇 주 전에 내가 아는 한 여자가 이야기해준 내용을 소개하겠다. 이것은 비록 낭만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최소한 새로운 맛은 있다. 




당시 나의 친구에게는 아이가 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그 중 큰아이가 심한 감기(추정하기로는)에 걸렸다. 그리고 코가 완전히 막혀버려서 며칠 동안 고생했다. 엄마는 그것이 곧 지나가려니 생각하고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허공 속에서 어떤 방안의 광경 같은 것이 그녀의 눈앞에 보였다. 그 방안의 테이블 위에는 그녀의 아이가 정신을 잃었는지, 죽었는지 누워있었고 몇 명의 사람들이 그 위로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그 광경은 매우 상세하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딸아이의 잠옷은 모두 분홍색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기는 흰 잠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 특히 눈에 띄었다. 

그 환시는 그녀에게 상당히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아이가 감기가 아니라 그보다 더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검사를 한 의사는 아이의 콧속에서 위험한 것이 자라나고 있으며 곧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며칠 후 아이는 입원하여 수술을 위해 침대 위에 눕혀졌다. 병원에 도착해서야 어머니는 집에서 아이의 잠옷을 잊어버리고 가져오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래서 간호원이 잠옷을 주었는데 그것은 흰색이었다. 아이는 다음날 이 흰옷을 입고 수술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녀가 환시로 보았던 바로 그 방이었으며 모든 상황이 그대로 똑같이 재현되었다. 




이 모든 경우에 그 예지는 목적이 이루어진 예이다. 그러나 책에는 경고를 무시함으로써 재앙을 당한 예가 무수히 많다. 어떤 경우에는 역사적인 사건에서처럼 그 사건에 개입할 힘이 없는 사람에게 정보가 주어지기도 한다. 콘월 지방의 광산지배인인 존 윌리엄스는 당시 재무상이었던 스펜서 퍼써벌 씨가 하원 의사당 로비에서 암살당하는 장면을 환시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보다시피 윌리엄 씨는 너무나 인상을 깊게 받은 나머지 그의 친구들에게 자신이 런던으로 가서 퍼써벌 씨에게 조심하라고 일러주어야 할지에 대해서 자문을 구했던 것이다. 불행히도 친구들은 그를 말렸고 암살사건은 결국 일어났다. 설사 그가 런던으로 가서 그 사실을 알렸다고 하더라도 그의 이야기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졌을지는 매우 의문스럽다. 그렇지만 살인을 막도록 어떤 경고를 줄 수 있었을 가능성 자체는 분명히 있는 것이다. 



이 기이한 예언적 환시가 고차원계에서의 어떤 특별한 작용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양자는 서로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들 사이의 어떤 긴밀한 공감에 의해서 일어난 것은 아니다. 만일 그것이 악운을 피하게 하려고 어떤 원조자가 일으킨 것이라면 그러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콘월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아마 윌리엄 씨는 꿈속에서 아스트럴계에 있을 때 우연히 이 미래의 투영을 보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광경에 놀라서 어떻게든 그것을 막아보려는 기대로 그것을 저차원의 마음속에 전해주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경우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카식 레코드를 통하여 조사해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전혀 의미가 없는 예지의 전형적인 경우는 스테드 씨의 『진짜 유령이야기』(p.83) 중에서 흔히 X 양으로 알려진 그의 친구인 프리어 양에 관한 이야기 속에 나온다. 이 아가씨는 어느 시골집에 머물고 있을 때 정신이 말짱하게 깨어있는 중에, 흰말이 끄는 이륜마차가 낯선 사람을 두 명 태우고 대문 앞에 섰고 그 중 한 사람이 마차에서 내려 사냥개와 장난을 치는 모습을 환시했다. 그녀는 그가 긴 외투를 걸치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자갈길 위에 새로 난 바퀴자국을 특별히 기억했다. 그러나 그때는 거기에 마차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반시간이 지나자 두 명의 낯선 사람이 정말 똑같은 마차를 끌고 나타났고 아가씨의 환시는 하나하나 정확히 재현되었다. 스테드 씨는 이와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는 예지의 경우를 또 한 가지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꿈과 그것이 실현되기까지의 사이에는 7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 모든 사례들은 (그리고 이들은 수많은 사례들 중에서 무작위로 고른 것에 불과하지만) 에고가 어느 정도의 예지는 분명히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사례는 우리가 문명인이라고 부르는 대다수 사람들이 지닌 저차원의 신체(육체)의 감응력 결핍과 지나친 밀도―주로 현시대의 조잡한 실질적 물질주의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만 아니라면 확실히 훨씬 더 빈번할 것이다. 나는 물질주의적 신념의 만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실제적 일상사에 있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이런저런 형태의 세속적 이해에 의해서 끌려다니는 현실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다. 



많은 경우에 에고 그 자체가 진화가 덜 되었기 때문에 그의 예지가 매우 불명확한 것일 수 있으며, 다른 경우에는 에고 자신은 명확히 보더라도 그 인상을 저급한 자아에게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다가올 재난에 대한 희미한 육감만 겨우 육신의 머릿속에 전달해주는 경우도 있다. 물론 또 그 예지가 에고의 작용이 아니라 어떤 이유로 해서 그 인상을 받는 사람에게 우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어떤 외계 존재의 작용인 경우도 있다. 위에서 내가 인용한 책 속에서 스테드 씨는 일반인의 시각으로는 눈꼽만치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펠멜 신문을 책임지게 되리라는 것을 여러 달 전에 확실히 직감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예지가 자신의 에고가 지워준 인상이었는지, 혹은 어떤 다른 존재가 준 힌트였는지는 정확한 조사가 없이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확신이 정당한 것이었음은 백일하게 밝혀졌다. 



빠트려서는 안 될 시간투시의 형태가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비교적 드문 종류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기록된 사례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개의 경우 그것을 확실하게 분석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세부사항들은 누락되어 있다. 유령 군대나 가축 떼의 유령을 목격한 사례를 소개한다. 『자연계의 이면』 속에는(462페이지 이하) 그러한 환시에 대한 이야기가 몇 가지 있다. 여기에는 리플리 근처에 있는 하바라 공원에서 수백 명이 넘는 한 부대의 흰색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다양한 대열을 전개하며 행군해 가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 저명인사들에 의해 목격된 이야기가 나와 있다. 또 몇 해 전에 그와 비슷한 유령 군대가 인버네스 부근에서 믿을 만한 농부와 그의 아들에 의해 목격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번에도 부대의 인원수는 매우 많아서 목격자들은 처음에는 그들이 육신을 가진 실체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적어도 32열 종대로 행군하고 있었으며 세세한 것까지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적인 여유도 있었다. 앞줄은 7열로 행군하고 있었으며 많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이 깡통과 다른 주방기구들을 들고 따라가고 있었다. 남자들은 붉은 옷을 입고 있었고 그들의 팔뚝은 햇빛을 받아 빛났다. 그들 가운데에 사슴인지 말인지 모를 동물이 보였는데 그들은 그것을 총검으로 마구 사납게 몰아가고 있었다. 

그 두 목격자 중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후미부대는 늘 선두를 따라잡느라고 바쁘다고 말했다. 군경험이 있는 아버지는 그에게, 그것은 언제나 그런 것이라고 하면서 만일 네가 군에 가거든 행군할 때는 앞쪽에 서도록 하라고 충고했다. 말을 탄 장교가 단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회색 말을 타고 금빛 레이스로 장식된 모자를 쓰고 붉은색 줄이 있는 넓은 소매의 파란색 경기병 외투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목격자는 그가 유난히 눈에 띄었기 때문에 그를 어디서 만나더라도 곧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후에 말했다. 그러나 그들을 킨티어에 상륙한 아일랜드 군인들로 생각한 그들이 군인들에게 행패를 당하거나 끌려갈까봐 두려워서 길을 비껴서 도랑둑을 오르고 있는 사이에 모든 것이 문득 사라져버렸다. 




이와 동일한 종류의 현상이 금세기 초에 웨스트팔리아의 페이더본에서 최소한 30명의 사람에 의해서 목격되었다. 그러나 몇 해 후에 2만 명의 사람들에 의해서 바로 그 장소에서 그 사실이 검증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 지방에서는 드물지 않은 능력인 모종의 제2투시안이었음이 틀림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가끔 이런 유령의 무리들은 보통의 군인들이 과거에 행군해 지나갔거나, 장차 지나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에서 목격되기도 한다. 그런 유령들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 중의 하나는 헤리에 마르띠누 양이 쓴 『영국의 호수들』이라는 글 속에 나온다. 그녀는 이렇게 써놓았다. 




지난 세기의 십년 동안에 이따금씩 유령들이 무수히 나타났다고 하는 싸우터, 혹은 싸우트라라고 불리는 이 산은 26명의 선택된 증인들과, 산이 보이는 곳에 사는 모든 주민들에게 똑같이, 그것도 한꺼번에 두시간반 동안 어둠 속에서 유령들의 쇼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산은 많은 사람들을 잇달아 죽어가게 한 난공불락의 절벽 투성이이며 그 서쪽과 북쪽 사면은 900피트의 수직 절벽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1735년의 어느 한여름날 저녁, 이 산에서 반마일 떨어진 곳에 사는 랑카스터 씨의 농장에서 일하는 한 일꾼은 한 시간 동안 이 산꼭대기의 동쪽 사면에서 군인들이 정상을 향해 까맣게 올라가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북쪽의 한 봉우리로부터 떼를 지어 나타나서는 정상에 이르러 움푹 들어간 곳으로 사라졌다. 이상한 것을 처음 본 사람이 늘 당하듯이 이 가엾은 친구도 그 이야기를 했다가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았다. 2년 후 역시 한여름날 저녁에 랑카스터 씨는 그곳에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사냥에서 돌아오는 듯 말을 앞세우고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것을 무관심하게 지나쳤다. 그런데 한 10분 쯤 후에 그곳을 다시 쳐다보았을 때 그들은 이제 말에 올라타고 봉우리로부터 나와서 5열 종대로 아까처럼 골짜기를 올라가고 있는 끝없이 긴 행렬의 선두에 서 있었다. 온가족이 모두 이 군대의 이동광경을 보았다. 말을 타고 종횡으로 지휘하는 장교가 각 부대를 인솔하고 있었다. 황혼이 지자 군기가 해이해진 듯 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행군속도도 제멋대로 되다가 어둠과 함께 모두 사라져버렸다. 물론 이번에는 일꾼이 전번에 그랬던 것처럼 랑카스터 씨의 일가족 전체가 조롱을 당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것은 헛소리가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 



1745년 한여름날, 어느 으스스한 저녁에 랑카스터 씨의 가족이 일부러 불러 모은 스물여섯 명의 사람이 전에 보였던 모든 것과 또 그 이상의 것을 목격했다. 이번에는 행렬 속에 여기저기 마차가 보였다. 싸우터 산꼭대기에 마차가 올라갔던 적도 없고 올라갈 수도 없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 숫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군대의 행렬은 1마일의 거리를 꽉 메우고 있었고, 해가 빠져서 안보이게 될 때까지도 여전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행렬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유령들의 모습은 희미하다거나 분명치 않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생생하게 보였기 때문에 그 중 몇몇 사람이 다음날 아침 말 발자국을 찾아보려고 산에 올라갔다. 그러나 풀 위에 단 한 개의 발자국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은 그들로서도 너무나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목격자들은 치안판사 앞에서 맹세하고 이 모든 것을 증언했다. 그리고 무서운 일은, 이 지방 사람들은 모두가 장차 스코틀랜드인이 폭동을 일으키리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즉 1743년에 다른 두 사람이 비슷한 광경을 보았지만 이웃들처럼 조롱을 당할까봐 그 사실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윌튼 산에 사는 뤠 씨와 그의 농장의 일꾼이 어느 여름날 저녁에 그 산 위에서 한 사람이 개를 앞세우고 말이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가파른 곳에서 몇 마리의 말을 쫓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달려가는 속도는 매우 빨랐고 절벽의 남쪽 끝에서 갑자기 사라졌으므로, 뤠 씨와 일꾼은 다음날 아침 틀림없이 죽어있을 그 사람의 시체를 찾아 산에 올라갔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도 개도 말도, 도무지 그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산을 내려와서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들이 입을 열었을 때에는 스물여섯 명의 맹세한 동지들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들의 명예를 위해서는 크게 보탬이 되지도 못했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서 『론스데일지』(제2권, p.313)의 편집자는, ‘1745년 한여름날 저녁에 그 반란군들은 스코틀랜드의 서해안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고 그들의 움직임이 신기루와 비슷한 어떤 투명한 수증기에 의해서 투영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충분한 설명이 못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그것은 현재로서는 최선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 사실들은 라이세스터샤이어에서 1707년에 목격되었던 비슷한 유령들의 행진 광경이나, 해마다 마스턴 무어 전투가 벌어졌던 전야가 되면 헤벨렌을 지나가는 행군 발자국 소리 등, 더욱 더 많은 사실들이 발굴되었다. 




유령 양떼가 자주 지나다니는 길과 같은 사례들을 비롯하여, 독일에는 사냥꾼과 강도들의 유령행렬에 대한 온갖 이야기들이 있다. 

이들 경우에는 신비현상 연구에서 흔히 드러나듯이 몇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으며 그 중의 어떤 것은 목격된 사건을 일으킬만한 꽤 그럴 듯한 원인이 될 수 있지만, 충분한 정보가 없는 한 어떤 특정한 사건에 이 중의 어떤 원인이 작용했는지는 다만 추정해보는 수밖에 없다. 



흔히 (허튼소리로 웃어넘길 수 없을 때마다) 제시되는 설명은, 상당한 거리에서 실제로 군대가 이동하는 모습이 신기루처럼 투영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나 자신도 신기루를 몇 번 보았던 적이 있으므로 그것이 사람의 눈을 착각하게 만드는 마력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어떤 때는 목격자 앞 불과 몇 야드 밖에서 지나가는 유령군대의 수수께끼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과학에 의해서 알려진 것보다 어떤 전혀 색다른 종류의 신기루가 필요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우선, 그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웨스트팔리아인의 경우처럼 단지 규모가 큰 미래환시의 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에 의해서 어떤 목적으로 나타났는지는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종종 미래의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일 수도 있으며 혹은 아카식 레코드로부터 투영되어 보인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도 그 방법과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떤 이유로든지 그들이 원한다면 그들의 놀라운 마법으로써 그러한 광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자연계의 정령들이 많이 있다.(신지학 입문서 시리즈 제5권 113페이지를 보라) 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인간들을 놀려주기를 즐기는 그들의 취향에 맞는 일일 것이다. 심지어 그것은 간혹 그들의 친구를 위해서 장차 일어날 사건을 경고해주기 위해서 친절히 계획된 것일 수도 있다. 마르띠누 양이 들은 이야기가 신빙성이 있는 것이라면 그녀가 묘사한 일련의 기이한 현상에 대해서는 이러한 맥락의 설명방법이 가장 그럴듯해 보인다. 단, 그녀가 들은 이야기가 신빙성이 있는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말이다. 



또 달리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은, 경우에 따라서 군인들로 보인 것은 단지 자연계의 정령들이 평소에 즐기듯이 어떤 질서정연한 대열을 전개하면서 지나다니는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매우 무지한 사람이 아닌 한 그것을 군대의 이동으로 오인할 수는 없는 성격의 것임은 인정하지만 말이다. 

가축떼는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 아카식 레코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사냥꾼’ 이야기처럼 우리의 주제와는 전혀 동떨어진 완전히 다른 종류의 현상에 속하는 경우들도 있다. 신비현상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매우 끔찍한 살인과 같은 공포나 격정의 현장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심령능력이 거의 없이도 목격할 수가 있을 정도로 가끔씩 재현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다양한 동물들이 그러한 주변상황의 일부를 구성하는 수도 있어서 이들도 살인자의 살의에 찬 행위에 의해서 주기적으로 재현되는 것이다.(신지학 입문서 시리즈 제5권 152페이지 참조) 

아마도 사냥부대나 말 탄 사람들 등의 온갖 유령 이야기들의 배후에 있는 사실의 근거들은 무엇이나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근래에 나온 『노스엠프톤샤이어 케인턴 부근 엣지힐 전투의 기이한 소음』이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소책자에 나오는 엣지힐 전투의 놀라운 재현과 같은 유령군대의 환시장면에 대해서도 명백히 설명이 된다. 이것은 실제 전투가 일어난 후 몇 개월 동안 이따금씩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데, 한 사람의 치안판사와 목사, 그리고 다른 목격자들이 증언을 했다. 그 소책자의 내용에 의하면 이것은 당시 몇몇 군장교들에 의하여 조사가 행해졌고 그들은 그 유령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을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억제되지 않은 격정이 스스로를 재현시키는 무서운 힘을 보여주는 한 예가 틀림없어 보인다. 어떤 기이한 방법에 의하여 그 기록이 물현되는 것이다. 



동물의 떼가 단지 사형장과 같은 특별히 공포스러운 장소에서 나오는 혐오스러운 방사물을 주워 먹기 위해서 동물의 형체를 취한 더러운 인공 엘리멘탈임이 분명한 경우도 있다. 『좀더 들여다본 보이지 않는 세계(More Glimpses of the World Unseen)』라는 책에 나오는 유명한 ‘지브 유령’, 혹은 지베트의 유령은 이런 종류의 한 예인데, 이것은 그 범죄의 유적이 남아있는 장소를 밤마다 파헤치며 뛰어다니고 싸우는 돼지 모양의 기형동물 떼 형태로 자주 출몰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투시라기보다는 유령의 범주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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