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시] 시간투시 - 과거 > 신지학 (리드비터)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신지학 (리드비터)

투시 [투시] 시간투시 - 과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2,585회 작성일 16-08-02 21:34

본문

Read: 797, Vote: 13, Date: 2005/10/20 23:24:46 
글 제 목 [투시] 시간투시 - 과거
작 성 자 문성호




제 7 장 

시간투시 - 과거 




시간투시, 즉 과거와 미래를 읽어내는 능력은 다른 모든 형태의 투시와 마찬가지로 매우 다양한 수준의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난다. 즉, 과거와 미래를 자유자재로 읽어내는 사람으로부터 다른 어떤 시점의 장면들을 무의식중에 매우 불완전하게, 그것도 간혹 한번씩 보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가 다양하다. 나중 형태의 사람은 예컨대 과거의 어떤 사건을 투시한다고 해도 그것은 매우 심하게 왜곡된 것일 경우가 많다. 설사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질서 없이 동떨어진 장면들의 연속일 뿐이어서 그 전후의 자초지종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할 수가 없는 경우가 십중팔구이며, 그 장면들 속에서 혹 발견될 수 있는 이상한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숙달된 사람은 자신이 보는 장면 전후의 드라마를 마음대로 쫓아가서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이나 그것이 장차 초래할 결말을 쉽게 추적할 수 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는 약간 난해한 이 주제를 자연스럽게 두 가지로 세분하고, 미래의 베일 틈을 들여다보는 미래 투시는 일단 나중으로 미뤄놓고 과거를 되돌아보는 과거투시를 먼저 다루는 것이 좋겠다. 두 가지 경우 모두 그 원리에 대해서 가능한 한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비록, 첫째는 일부 주제에 대해서 연구자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의 불완전함으로 해서, 그리고 둘째로는 고차원계와 그 능력에 대해서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매우 작은 부분조차도 그 백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하는 물질언어의 한계로 해서 우리의 이해가 기껏해서 매우 변형된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러면 오래된 과거를 소상하게 투시해내는 경우는 대체 그런 정보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이며 또 그것은 자연계의 어떤 차원에 속하는 것일까?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해서는 그것은 아카식 레코드로부터 읽어오는 것이라고 한마디로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대신 많은 독자들이 이 말에 대해서 약간의 설명을 요구할 것이다. 




아카식 레코드란 말은 사실은 약간 잘못된 명칭이다. 그 기록은 아카샤(Akasa), 즉 멘탈계의 질료로부터 읽어오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실제로 그 기록이 속해 있는 곳은 아니다. 가끔 이 대신 사용되는 명칭인 ‘아스트럴 빛의 기록’은 그보다도 더 적당치 못하다. 왜냐하면 이 기록은 아스트럴계를 훨씬 넘어선 곳에 있으며 아스트럴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그것이 두 번 반사된 상을 단지 일부분 희미하게 볼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는 곧 설명할 것이다. 



다른 많은 신지학의 용어들처럼 아카샤라는 말은 매우 모호하게 사용되어 왔다. 신지학 초기의 책들에서는 아카샤는 아스트럴 빛과 동의어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다른 책에서는 그것은 물라프라크리티(Mulaprakriti)로부터 물질계의 에테르에 이르기까지 모든 보이지 않는 물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후기의 책들에서는 이 말의 용도가 멘탈계의 물질에만 한정되었다. 그리고 그 기록을 아카식 레코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왜냐하면 그 기록은 원래 멘탈계에서 만들어지지는 않지만 우리가 처음으로 그것을 확실히 접하게 되고, 또 그것을 가지고 신빙성 있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은 멘탈계에서이기 때문이다. 




이 기록에 대해서는 결코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지금까지 도달한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진화단계의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진정한 해답은 현재로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어떤 차원계보다도 훨씬 더 높은 차원계에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위로부터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올려다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결코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작은 일면을 완전한 전체로 간주해버리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개념이 단지 부분적인 것일 뿐일지라도 오해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은 정확한 개념을 가질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인다면 진화와 함께 더 높은 지혜를 점차 쌓아감에 따라 부가시켜야 할 것은 많이 발견될지언정 수정해야 할 점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 주제의 완전한 이해는 우리의 현재의 진화수준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과, 설명이 틀림없이 발견되리라고 생각되는 방향을 제시하거나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현재로서 완전한 설명을 제공하기는 불가능한 많은 부분들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만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속해 있는 이 태양계의 시초로 우리의 생각을 돌이켜보도록 하자. 우리는 모두 태양계의 기원에 관한 일반적인 천문한 이론―성운설이라고 부르는―을 잘 알고 있다. 이에 의하면 최초에 태양계는 갈수록 점점 더 커지는 거대한 성운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한다. 그 직경은 태양계 최외곽에 있는 별의 궤도보다도 훨씬 더 컸으며,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 거대한 구체는 점차 식어지고 수축하여서 현재와 같은 태양계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신비과학은 이것을 그 대략적인 윤곽에 있어서 태양계 진화의 순전히 물리적인 측면만을 정확히 기술한 이론으로서 인정한다. 그러나 신비과학은, 만일 우리가 이처럼 물리적 측면에만 중점을 둔다면 우리는 실제의 사건에 대한 매우 불완전하고 일관성 없는 개념밖에 가질 수가 없을 것이라는 단서를 덧붙일 것이다. 신비과학은 한 태양계의 구성을 책임지고 있는 높은 존재(이를 우리는 태양계의 로고스라고도 한다)가, 수반되는 모든 계를 포함한 전체 태양계의 완전한 관념을 맨 먼저 마음속에 형성시킨다는 사실을 기본 전제로 하고 출발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한 관념을 형성시키는 행위 그 자체로 해서 <그>는 전 태양계를 자신의 상념의 차원상에 즉시적, 객관적 존재로서 존재하게 한다. 이 차원계는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차원계보다도 훨씬 더 높은 것이며 그로부터 온갖 천체들이 필요에 따라 각각에게 정해진 상태의 더 구체화된 객관성 속으로 하강되는 것이다. 전 태양계가 사실은 태초부터 고차원계에서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물리적 진화의 이치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신비과학은 이 주제에 관해서 우리에게 이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신비과학은, 우리가 속해 있는 이 경이로운 태양계가 로고스에 의해서 저차원계와 고차원계에서 그 존재를 띠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태양계와 로고스의 관계는 그보다도 더 밀접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왜냐하면 태양계는 절대적으로 <그>의 일부분―물질계에 현현한 그의 일부분―이며, 전체 태양계의 운동과 에너지는 그의 에너지이며, 오직 그의 오라의 경계 안에서 운행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엄청난 것이기는 하지만 오라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에게는 이것이 전혀 상상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영적으로 성장해감에 따라 그의 오라의 한계를 결정하는 원인체(Causal body)의 크기와 밝기와 색조의 순도가 눈에 띄게 증가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상당한 영적 진보를 이룩한 수행자는 이제 겨우 영적인 길에 발을 디뎌놓은 초심자보다 오라가 훨씬 더 크며 높은 경지에 오른 도인의 경우에는 그보다도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우리 중의 많은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동양의 매우 대중적인 경전 속에서도 붓다의 오라가 엄청나게 넓게 뻗쳤다고 묘사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 중 어떤 책에는 그 경계가 3마일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 정확한 수치야 어찌되었든 간에 여기서도 우리는 인간이 영적으로 성장해갈 때 그 원인체가 매우 빠른 속도로 커진다는 사실에 대한 또 하나의 기록을 발견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 성장의 속도 자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매우 높은 경지의 도인은 그의 오라로써 온 세계를 한꺼번에 감쌀 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더라도 놀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조금씩 생각을 끌어올려 태양계 전체를 자신 속에 포용할 정도로 높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조차 우리에게는 엄청난 이리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마저도 대양과도 같은 공간 속의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의 것이며 그를 통하여 나오며 그에게로 돌아간다’, 또 ‘그의 안에서 우리는 살고 움직이며 존재를 영위한다.’는 옛말이 로고스(상상가능한 지고의 신에게 부여할 수 있는 모든 권능과 품성을 지닌 자인)에게는 문자 그대로 사실인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태양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절대적으로 태양계 로고스의 의식 속에서도 일어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록은 바로 그의 기억임이 틀림없음을 곧 알 수 있다. 



그리고 더군다나 이 경이로운 기억이 존재하는 차원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것보다도 높은 곳에 있는 것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게 된 그 어떤 기록도 그 높고 위대한 사실이 저차원계의 조밀한 매질 위에 비추어진 단순한 그림자일 뿐임은 확실하다. 




아스트럴계에서는 이것이 사실임이 곧 밝혀진다. 즉, 우리가 대하는 것은 단지 그림자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며 매우 불완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접할 수 있는 기록은 지극히 부분적인 것이며 종종 심히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스트럴 빛의 상징으로서 물이 매우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경우에 있어서는 그것은 매우 적절한 상징이다. 고요한 수면에서는 주변이 대상을 마치 거울처럼 똑똑히 비춰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껏해야 하나의 그림자일 뿐이다. 즉, 그것은 3차원적 실체가 2차원적으로 표현된 것이며 따라서 색깔을 제외한 모든 속성이 달라지며 게다가 그것은 늘 뒤집어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 수면이 바람에 흔들린다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겠는가? 물론 여전히 그림자를 발견하겠지만 그것은 그 실체의 진정한 모습을 아는 데에는 소용이 없거나, 오히려 오해하게 만드는 부서지고 일그러진 상일 것이다. 여기저기서 순간적으로 부분 부분―예컨대 나무의 잎사귀 하나―의 뚜렷한 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많은 수라고 하더라도 조각조각 분리된 상의 파편들을 주워 모아서 투영된 실체의 진정한 모습에 가까운 무엇을 그려낸다는 것은 상당한 노력과 자연의 법칙에 대한 지식을 요구할 것이다. 




그런데 아스트럴계에서는 고요한 수면에 비길만한 어떤 것도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밖에는 대할 수가 없다. 그러니 뚜렷하고 분명한 투영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그러므로 아스트럴 차원의 투시능력밖에 지니지 못한 투시자는 그의 눈앞에 나타나는 과거의 광경이 결코 정확하고 완전한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군데군데 부분적으로는 정확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는 과연 그 중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를 알아낼 방법은 가지고 있지 않다. 만일 그가 적합한 스승의 지도를 받고 있다면 주의 깊고 오랜 훈련을 통해서 어느 것이 신빙성 있는 것이며 어느 것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가려내고 조각난 파편들로부터 그 실체의 상을 그려내는 방법을 터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그런 어려운 방법을 터득하기 오래 전에 이미 그러한 방법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멘탈 투시력을 터득해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멘탈계라고 부르는 그 다음의 차원계에서는 상황은 매우 다르다. 거기서는 기록은 완전하고 정확하며 그것을 잘못 읽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멘탈 차원의 투시력을 가진 세 사람이 거기에 있는 어떤 기록을 읽어오기로 했다면 그들에게 나타나는 비전은 정확히 같은 투영이며 그것을 읽어냄에 있어서도 각자가 모두 정확한 인상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나중에 물질계에서 각자의 노트를 비교해보았을 때 그 내용이 정확히 일치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세 사람이 물질계에서 일어난 어떤 일을 관찰하고 그것을 나중에 묘사하게 했을 때 그들의 이야기가 상당히 상이하리라는 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 각자는 자신의 주의를 가장 끄는 점에 주목을 할 것이며,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점을 무시한 채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그 사건의 특징적인 성질로 간주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멘탈계에서 관찰하는 경우에는 이 개인 차이가 받아들여지는 인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대상 전체를 완전히 파악할 것이며 어느 한 부분만을 특징적으로 보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밀한 훈련과 경험을 쌓은 사람이 아닌 한 이러한 요인은 그가 그 인상을 낮은 차원으로 옮기려고 할 때에 작용하게 된다. 멘탈계의 비전이나 경험을 물질계에서 완벽하게 설명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보고 느낀 것의 90퍼센트는 물질계의 언어로는 결코 옮겨질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표현이 부분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표현된 그 부분들은 임의로 선택된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신지학회의 최근의 연구에 있어서 투시자들의 증언에 대한 끊임없는 검증이 그토록 강조되어온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신지학회 후기의 책들에는 단지 한 사람의 투시에만 의존한 내용은 절대로 실리지 못했다. 



그러나 정밀한 대조를 통해서 이 개인차이라는 요인에 의한 오류는 줄였다고 하더라도 고차원계의 인상을 저차원계로 가져오는 작업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우 심각한 난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것은 3차원 공간의 경치를 평면―실제로 2차원 공간인― 위에 표현하려는 화가가 겪는 어려움과 유사한 것이다. 화가가 자연의 모습을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표현하려면 눈과 손을 숙달시키기 위해 오랜 기간의 치밀한 훈련이 필요하듯 투시자가 고차원계에서 투시한 것을 낮은 차원계에서 정확히 묘사하기 위해서는 치밀하고 오랜 훈련이 필요하다. 미숙한 투시자로부터 정확한 묘사를 기대한다는 것은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사람에게서 완벽한 풍경화를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가장 완벽한 그림조차도 실제의 묘사된 장면과는 한참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림 속의 선 하나, 각도 하나도 실체와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감각 중에서도 오직 한 가지의 감각에, 평면상의 선과 색채로써, 그 경치를 실제로 대했을 때 느껴지는 것과 유사한 인상을 전달해보려고 애쓰는 것은 한마디로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전적으로 자신의 과거의 경험에 의존하는 연상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그림은 파도소리나 꽃향기, 과일의 맛, 혹은 표면의 부드럽고 거친 감촉은 결코 전달해주지 못한다. 



이보다 정도가 훨씬 더 심하기는 하지만 투시자가 자신이 아스트럴계에서 본 것을 물질계에서 묘사하려고 할 때 겪는 어려움도 이와 동일하다. 화가가 사람이나 동물, 들과 나무를 그릴 때처럼 투시자도 듣는 사람에게 그들이 이미 친숙해 있는 개념만을 상기시키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바로 그 매우 불완전한 수단으로 그들에게는 대부분 전혀 낯선 개념들을 이해시켜야만 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그 어려움은 더욱 더 커진다. 




그렇다면 그의 이야기가 듣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생생하고 놀라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신은 그것이 전혀 적당한 표현이 못되며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실제로 본 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절감해야만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멘탈계에서 읽어 와서 물질계에 보고된 기록의 경우는 고차원계로부터 저차원계로의 난감한 이동작업이 한 번만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중간에 있는 아스트럴계를 거쳐서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다. 탐사자가 멘탈 차원의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육체 속에서 깨어 있는 동안에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물질계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장애를 느낀다. 



잠시 앞의 장에서 약간 언급한 바 있는 소위 4차원이라는 것을 실감해보도록 노력해 보자. 우리가 몸담고 있는 3차원 공간, 즉 물체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를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3차원의 각 차원(길이, 너비, 높이)이 서로에 대해서 직각인 선으로써 (수학의 X, Y, Z 좌표계의 축과 같이) 표현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4차원 개념이란 이미 존재하는 3차원 좌표계에 대해서 모두 직각인 제4의 선을 그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해서 특별히 연구한 몇몇 사람들은 차츰 한두 가지의 매우 단순한 4차원 형상을 인식할 수 있게끔 되었지만 일반인들은 이 개념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들 과학자들이 이 물질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말로도 일반사람들에게 이 4차원 형상들의 모습을 이해시킬 수가 없다. 그리고 이 방면에 대해서 특별히 조예가 없는 독자가 그런 형상을 상상하려고 시도해보면 그는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한 4차원 형상을 물질계의 언어로써 명확히 표현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아스트럴계의 단일한 대상을 정확히 묘사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멘탈계에서 기록을 조사할 때에는 5차원계의 어려움에 직면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피상적으로 관찰한 것일지라도 이 기록들을 제대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기록들을 로고스의 기억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기억을 훨씬 초월한 그 무엇이다. 이 이미지가 <그>의 시각에는 어떻게 보이는지를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더욱 더 높이 올라갈수록 진정한 기억에 점차 다가가고 있다는 것―<그>가 보는 것에 더욱 더 비슷하게 근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투시자가 붓디계에 올라서게 되면 이 기록에 관한 그의 경험이 큰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붓디계는 아라하트(Arhats)의 경지를 얻기 전까지 그의 의식이 육체를 떠나 있을 때에도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이다. 




여기서는 시간과 공간이 더 이상 그를 속박하지 않는다. 멘탈계에서처럼 그는 일련의 사건들을 쭉 훑어보아야 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이 지상에서는 어불성설처럼 들리겠지만 그의 앞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나란히 동시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처럼 높은 차원계조차도 사실은 로고스의 의식보다는 한참 낮지만 그래도 거기서 보이는 것으로부터만 유추해 보더라도 <그>에게는 그 기록이란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을 훨씬 초월하는 무엇임이 너무나 확실하다. 왜냐하면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과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이 <그>의 눈앞에는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일과 똑같이 <지금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제한된 사고로는 도무지 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절대적인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현재의 지식 정도로는 어떻게 그토록 놀라운 결과가 일어나는지를 이해하기를 기대조차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설명을 시도한다는 것은 곧 아무런 정보도 얻어낼 수 없는 언어의 안개 속으로 우리 자신을 빠트리는 것밖에는 안된다. 하지만 그것을 설명할 가능성이 있는 어떤 방향을 제시해줄지도 모르는 한 가지 생각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렇게 놀라운 말이 결국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님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 마음의 폭을 넓히는 데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30년쯤 전에 나는 매우 흥미로운 작은 책을 한 권 읽은 기억이 있다. 그것은 아마 『별들과 지구』라는 제목이었을 것이다. 그 책의 내용은 신에게는 어째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완전히 동시적인 것인지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그 책의 매우 독창적인 논리는 당시의 나에게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논했던 주제와 관련해서 시사적인 점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므로 그 내용을 여기서 요약해보기로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 그것이 손에 든 책이든 수백만 마일 떨어져 있는 별이든 간에, 대상으로부터 우리의 눈에 와 닿는 에테르의 진동, 즉 소위 광선을 통해서 그것을 본다. 그런데 이 파동이 지나가는 속도는 너무나 빨라서 ―초속 30만km― 우리가 지상에서 어떤 물체를 본다고 생각할 때는 실질적으로 그것을 동시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간(星間)의 거리를 다루게 된다면 우리는 빛의 속도를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빛이 이 광활한 공간을 가로지르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빛이 태양으로부터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에는 8분 15초가 걸린다. 그러므로 태양을 바라볼 때 우리는 적어도 8분 이전에 출발한 빛을 통해서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매우 재미있는 결과가 야기된다. 우리가 태양을 볼 수 있게 하는 그 광선은 분명히 그것이 태양을 출발했을 당시에 있었던 일밖에는 우리에게 알려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빛은 그 후에 일어난 어떤 일에도 결코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 태양의 <현재> 모습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8분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어떤 중요한 일이 태양에 일어났다면 ―예컨대 새로운 흑점이 생겼다는가 하는― 그 시간에 망원경을 통해서 태양을 관찰하고 있던 천문학자는 그 일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 새로운 소식을 담은 광선은 8분 이상이 지나야만 그에게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치는 항성의 경우에는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에는 그 거리가 엄청나게 더 멀기 때문이다. 예컨대 북극성은 너무나 멀어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를 지닌 빛조차도 그곳으로부터 우리에게 도달하려면 50년이 조금 더 걸린다. 그러므로 이에 의하면 우리는 북극성을 있는 그대로, 현재 위치에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50년 전의 위치에 있는, 그때의 모습을 보고 있다는 이상하지만 불가피한 결론이 나온다. 만일 내일 당장 우주에 어떤 대이변이 일어나 북극성이 산산조각 나버린다고 해도 그 엄청난 이변이 천문학자의 눈에 들어오기까지 우리는 여전히 북극성이 창공에서 평화롭게 깜박이는 모습을 보면서 평생을 살 것이며 우리의 아이들이 중년이 되기까지도 그들은 그들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북극성을 바라보며 이야기꽃을 피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빛이 출발해서 우리에게 도달하기까지 수천 년이 걸리는 다른 별들이 있으며 그런 별들의 상태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는 수천 년씩이나 뒤떨어진 정보이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우리가 한 사람을 지구에서 30만km 떨어진 지점에 데려다 놓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가 그런 먼 거리에서도 마치 우리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이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하자. 그가 모든 것을 그것이 일어난 1초 후에 보게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현재 그는 1초 전에 일어난 일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거리가 두 배가 된다면 그는 2초 뒤늦어지는 식으로 계속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를 태양과의 거리만큼 떼어놓아 보자. (그는 아직도 그 신비한 천리안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그는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보는 것이 아니라 8분 15초 전에 했던 행동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를 북극성에다 데려다놓아 보자. 그러면 그는 50년 전의 사건이 눈앞에 지나가는 모습을 볼 것이다. 즉, 그는 바로 그 순간 실제로는 중년이 되어 있는 아이들이 장난하고 노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과학적으로도 문자 그대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소책자는 논리정연하게도 전능하신 신께서는 우리가 그 관찰자에게 부여했던 신비로운 능력을 틀림없이 지니고 있을 것이며 게다가 모든 곳에 편재하시므로 우리가 언급한 모든 장소에, 그리고 그 중간의 모든 지점들에 순차적으로가 아니라 동시적으로 존재할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우주의 태초로부터 일어난 모든 사건들이 신의 눈앞에서는 바로 이 순간에 펼쳐지고 있음이 <틀림없으며> 그것은 한갓 기억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그 자체를 신이 보고 있는 것이라는 불가피한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주장은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이며 순전히 물질과학의 차원에서만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로고스의 기억이 작용하는 것은 그런 방법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주장은 매우 용의주도하고 논박할 수가 없는 것이며, 내가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측면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어떤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사건의 장면을 보고자 할 때 이처럼 과거의 기록들이 뒤죽박죽 얽혀 있는 가운데서 그것을 어떻게 찾아내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날 것이다. 미숙한 투시자에게는 찾고자 하는 대상과 영적인 교류를 맺을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실마리가 없이는 그것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탐흔능력은 그 적절한 예이다. 그리고 우리의 보통의 기억도 사실상 동일한 개념이 다르게 표출된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질료의 입자와 그것의 역사를 담고 있는 기록 사이에는 일종의 자기력, 혹은 친화력이 존재하고 있어서 이것이 기록과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일종의 전선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같이 보인다. 



예를 들자면, 나는 언젠가 스톤헨지(영국 솔즈베리평원에 있는 거대한 돌기둥들로 이루어진 석기시대 후기의 구조물)에서 바늘귀보다도 크지 않은 아주 작은 돌조각을 봉투에 담아온 적이 있다. 이것을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한 탐흔능력자에게 보여주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보자마자 그 경이로운 유적과 그 주변에 펼쳐진 황량한 들판의 풍경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곳의 지난 역사 속에서 나오는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장면의 내용을 생생히 묘사해 나갔다. 이것은 그 미세한 돌조각조차도 그녀를 그것이 나온 장소와 관련된 기록들과 연결시켜주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거쳐가는 장면들도 스톤헨지의 역사가 돌조각에 미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뇌세포 위에 작용되는 것 같다. 그 장면들이 뇌세포들과 연관을 맺음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그 특정 기록과 관계를 맺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숙달된 투시자들조차도 자신이 모르는 사건의 기록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일정한 실마리를 필요로 한다. 예컨대 줄리어스 시저가 영국의 해안에 상륙하는 장면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을 찾아내는 데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만일 투시자가 그 해안에 가보았던 적이 있다면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 장소를 머리 속에 그리고는 그곳의 기록을 더듬어서 찾고자 하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일 것이다. 그가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면 먼저 그 사건이 일어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다음 영국해협에서 로마군의 갤리선 함대를 찾아보거나, 아니면 그 시대의 로마 역사를 더듬어가면 시저와 같은 특출한 인물은 쉽사리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를 찾은 다음에는 그가 영국에 상륙하는 것을 찾아낼 때까지 그가 일으킨 갤리선 전쟁을 모두 조사해보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 기록의 성질에 관해서 종종 질문을 한다. 그것이 문에 멀게 보이는지 혹은 가깝게 보이는지, 그 속의 인물들은 작게 보이는지 크게 보이는지, 각각의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지 아니면 흐릿하게 서로 겹쳐 보이는지 등등. 이에 대해서는, 그것이 보이는 상황에 따라서 그 모습은 어느 정도 변한다고 밖에 대답할 수 없다. 아스트럴계에서는 그것이 비쳐 보이는 모습은 거의가 단지 그림 같은 하나의 장면이지만 간혹 그 속의 인물들이 움직이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단지 순간포착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좀더 완전한 투영이 일어난 결과이다. 




멘탈계에서는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크게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멘탈계를 방문한 사람이 기록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특별히 하지 않고 있을 때에는 그것은, 마치 방벽에 걸린 커다란 거울에 비친 상이 그 방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배경을 이루고 있듯이, 단지 그 상황 속의 배경을 이룬다.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상황에서는 기록은 사실상 지극히 높은 차원계의 대 의식의 끊임없는 활동이 투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활동사진이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과 매우 비슷하게 보인다. 그 장면들은 서로 흐릿하게 겹쳐지지 않으며 마치 멀리서 배우의 연기를 보고 있는 것처럼 투영되는 인물들의 동작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숙달된 투시자가 어떤 특정한 장면에 대해서 주의를 돌리게 되면, 혹은 그것을 눈앞에 불러내고자 하면 곧 기이한 변화가 일어난다. 왜냐하면 이곳은 상념의 차원계이기 때문에 어떤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곧 그것을 즉시 자신의 앞에 불러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앞에서 예로 든 사건―줄리어스 시저의 영국 상륙―의 기록을 보고자 한다면 그는 그 즉시, 그림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기원전 55년 가을날 아침에 실제로 거기에 서 있었다면 보았을 것과 모든 면에서 동일한 광경이 온통 살아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로마 군인들과 함께 그 바닷가에 서 있게 될 것이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단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물론 그 안의 인물들은 그에 대해서는 전혀 무신경하며, 그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의 행동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는 그 드라마가 눈앞에 지나가는 속도만은 조절할 수가 있어서 일년이 꼬박 걸리는 사건을 그의 눈앞에서 한시간만에 지나가게 할 수도 있으며 또 어는 순간에든지 그것을 멈추게 해서 어떤 특정한 장면을 한 장의 그림처럼 마음대로 오랫동안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그 곳에 육신을 지니고 존재했다면 보았을 광경만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이상이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것을 듣고 이해할 수 있으며 그들 한사람 한사람의 속마음을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록들을 읽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 앞에 열리게 될 많은 가능성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의 하나는 오랜 고대의 인간들의 상념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동굴인이나 호상(湖上)거주인들을 비롯해서 아틀란티스, 이집트, 칼데아 등의 위대한 문명을 지배했던 사람들까지도 말이다. 이 능력을 완전히 소유한 사람에게는 어떤 놀라운 가능성이 열려 있을지는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의 앞에는 가장 흥미로운 역사 연구 분야들이 열려 있다. 




그는 틈틈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역사를 되짚어보고 그것이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동안에 생기게 된 오류와 오해를 바로잡을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태초로부터 비롯되는 지구역사 전체로 마음대로 범위를 확대해나갈 수가 있어서 인간의 지능이 서서히 발달해온 과정, 그리고 불의 신이 내려오고 그로 인해서 일어난 위대한 문명들의 발달과정 등을 지켜볼 수도 있다. 




그의 연구대상은 인간의 진보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마치 박물관에 있는 것처럼 지구의 유년기를 풍미했던 모든 기이한 동물들과 식물들을 눈앞에 두고 있고 지구역사상 일어났던 모든 경이로운 지질학적 변동들을 추적할 수 있으며 지구의 얼굴을 끊임없이 바꾸어놓았던 지각의 대변동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한 가지 특별한 경우에는 기록을 읽는 이가 과거를 훨씬 더 가까이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가 탐사 중에 자신의 전생에 일어난 사건의 광경을 관찰하게 되면 그는 그것을 두 가지 방법으로 대할 수가 있다. 즉, 그는 평소처럼 그것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도 있으며(그 관찰자의 통찰력과 감응력은 언제나 완벽한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지만), 아니면 오래 전에 죽었던 자신의 인격과 다시금 일체가 되어 잠시 동안 자신을 오랜 전생의 삶으로 되돌림으로써 유사이전의 과거에 느꼈던 기쁨과 고통, 상념과 감정 등을 완전히 새롭게 경험해볼 수도 있다. 이를 통해서 겪는 경험보다 더 가슴 벅차고 생생한 모험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 중에도 그는 결코 자신의 개체성에 대한 의식을 잃어서는 안 되며 언제든지 현재의 인격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투시자는 어떻게 하여 기록 속에서 오랜 과거의 어떤 장면의 날짜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가 있는지에 대해서 종종 질문이 들어온다. 사실 정확한 날짜를 알아낸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매우 힘 드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만한 고생을 무릅쓴다면 그것은 대개의 경우 가능한 일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나 로마 시대를 다루고 있다면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 장면 속에서 가장 지성적인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봄으로써 그가 생각하고 있는 그날의 날짜를 알아내는 것이다. 아니면 그가 편지나, 혹은 다른 문서를 작성할 때 거기에 쓰인 날짜를 알아내면 된다. 일단 그 시대의 날짜를 알아내었다면 그것을 우리 달력의 날짜로 환산하는 것은 다만 계산의 문제일 뿐이다. 




자주 사용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조사하던 장면으로부터 눈을 돌려서 로마와 같은 당시의 유명한 대도시의 광경 속으로 들어와서 당시의 왕조나 집정관의 이름을 알아놓는다면 그 다음은 그것을 역사책에서 대조해보기만 하면 될 것이다. 때로는 국가의 어떤 선포문이나 공공문서를 조사해봄으로써도 날짜를 알아낼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논하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시디에서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도 이보다 더 옛날, 즉 고대 이집트나 칼데아, 중국, 혹은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서 아틀란티스와 그 무수한 식민지 등의 시대를 다루게 되면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도 그 시대 지식인의 마음속에서 날짜를 쉽게 알아낼 수는 있지만 그것을 우리의 달력으로 환산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연대나, 역사의 암흑기 속에 묻혀버린 왕조로써 날짜를 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투시자가 기록을 원하는 속도대로 ―원하기만 한다면 1년을 1초만에도, 혹은 그보다도 더 빨리― 자유자재로 눈앞에 지나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미 그 날짜가 정확히 밝혀져 있는 고대의 사건들이 한두 가지는 있다. 예를 들면 포세이도니스가 바다 속에 가라앉은 것은 기원전 9,564년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 장면이 이런 사건들과 웬만한 시간간격 내에 있는 것이라면 그 주변 환경의 윤곽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그리고 기록을 빠르게 훑어지나가면서 두 사건 사이에 지나간 햇수를 세어보는 간단한 방법에 의해서 그 사건과의 시간관계를 알아낼 수 있는 가능성은 확실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흔히 그런 것처럼 수천 년 이상씩이 되면 이 방법은 매우 힘들어진다. 이런 경우에는 다시 천문학적인 방법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흔히들 춘분점의 세차운동이라고 부르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구의 제2공전운동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움직임에 의하여 적도와 황도 사이의 각도는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가면 더 이상 지구의 극점은 천구의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달리 말하면 현재의 큰곰자리가 아닌 다른 별이 우리의 북극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논하고 있는 장면의 밤하늘을 주의 깊게 관찰함으로써 이 지구의 극점이 가리키는 자리를 알아낸다면 그 대강의 날짜를 어렵지 않게 계산할 수 있는 것이다. 수백만 년 전의 선사인류에게 일어났던 사건의 날짜를 말하는 데에는 지구의 제2공전주기(혹은 춘분점의 세차운동)가 그 단위로 흔히 사용된다. 그러나 물론 그런 경우에는 절대적인 정확성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처럼 오랜 시대를 논하는 데에는 실제로 반올림한 숫자만으로도 족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전생의 기록이든 남의 전생의 기록이든 간에 그것을 정확하게 읽어낸다는 것은 사전에 치밀한 훈련을 하지 않은 사람이 간단히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스트럴계에서도 간혹 반영을 읽을 수 있지만 신빙성 있게 읽어내기 위해서는 멘탈 감각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사실 오류의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투시자가 깨어있는 동안에도 멘탈 감각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 해에 걸친 엄격한 자기통제와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신지학회의 입회원서에 서명하고 들어오기만 하면 서너 번의 전생쯤은 당장 기억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그 중의 몇몇은 재빨리 상상력을 동원해서 자신은 전생에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나 클레오파트라, 혹은 줄리어스 시저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처럼 어리석은 자의 엉뚱한 주장은 그 자신의 신용을 실추시키기도 하지만 그로써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당하게도 그들이 속해 있는 신지학회의 신용까지도 실추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자신이 전생에 호머나 셰익스피어였다는 확신이 참을 수 없이 들끓는다는 사람은 그 소식을 세상에 알리기 전에 잠시 마음을 진정하여 물질계의 상식수준 검사부터 먼저 받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꿈속에서 자신의 전생의 장면들을 본 사람들이 일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대개가 부분적이며 신빙성이 없는 것들이다. 나 자신도 젊었을 적에 이런 종류의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나는 끊임없이 전생이 나타나는 꿈을 꾸었다. 우아한 건물이 서 있는 언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름다운 해변이 굽어보이는 현관을 가진 집이 보이는 꿈이었다. 나는 그 집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방의 위치와 창에서 내다보이는 경치 등을 현생의 내 집에 대해서 알고 있는 만큼이나 친숙하게 알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윤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으므로 이 꿈이 자꾸만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것이 다만 기이한 우연으로만 생각되었다. 내가 신지학회에 입회하고도 얼마 지난 후에 나와 아는 사람이 내 전생의 장면을 보여준 후에야, 그 끊임없이 나타나던 꿈의 장면이 사실은 기억의 일부분이었으며 내가 그토록 잘 알고 있었던 집은 바로 2000년 전 내가 태어난 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잘 기억된 장면이 이처럼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이어서 나타나는 기록된 사례가 몇 있기는 하지만 윤회의 과정을 확실하게 추적해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든 남의 능력이든 간에 상당한 정도의 신비능력이 요구된다. 이 사실은 풀어나가야 할 문제점들을 고려한다면 명백해진다. 어떤 사람의 현생으로부터 전생으로 추적해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현생을 출생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다시 에고가 육신을 입고 내려오는 단계까지 거꾸로 추적해야만 한다. 




이로써 결국은 멘탈계의 높은 차원에 있는 에고의 상태에까지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육신 속에서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해당 차원계의 감각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해서 그의 의식은 더 이상 저차원의 인격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환생하는 에고 그 자체 속에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에고의 기억이 일깨워짐에 따라 그의 지나간 전생이 마치 펼쳐놓은 책처럼 그의 눈앞에 전개된다. 그리고 원한다면 그는 또 그 차원에서 다른 사람의 에고의 상태를 조사함으로써 그를 거기까지 이끌어온 그의 저차원 멘탈계와 아스트럴계의 삶과 그 에고의 마지막 육체적 죽음까지 추적하여 그의 전생에 도달할 수 있다. 




꼬리를 물고 윤회하는 전생을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은 이 방법밖에는 없다. 그리고 따라서 우리는 전생을 알아낼 수 있다고 선전하고 한 생애당 얼마씩 돈을 받아먹은 의식적, 무의식적인 사기꾼들을 한눈에 알아낼 수가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진정한 신비가는 선전을 하지도 않을뿐더러 어떤 상황에서도 능력을 보여주는 대가로 돈을 받지는 않는다. 




전생을 추적해가는 능력을 얻고자 하는 수행자에게는 분명히 말하건대 오직 자신에게 맞는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그 방법을 배우는 수밖에는 없다. 인간은 선하고 헌신적이며 ‘형제애’로 가득한 가슴만 지니면 고대의 모든 지혜가 저절로 흘러들어온다고 끈덕지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약간의 상식만 있다면 이 주장의 허무맹랑함은 이내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가 아무리 착하다고 해도 구구단을 배우려면 공부를 해야만 한다. 영능력의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진화해가면 능력이 저절로 발현되는 것은 틀임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효용하게 사용하는 방법은 오직 꾸준하고 인내심 있는 노력을 통해서만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잠자는 동안 아스트럴계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자 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들이 지상에서 더 많은 지식을 가질수록 높은 아스트럴계에서도 더 가치 있는 봉사를 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외국어 지식은 유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멘탈계에서는 언어를 불문하고 상념전달을 통해서 직접 대화할 수가 있지만 아스트럴계에서는 그렇지 못하며, 상념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언어의 형태로 정확히 옮겨야 한다. 그러므로 만일 아스트럴계의 어떤 사람을 돕고자 할 때는 그와 대화가 통하는 특정 언어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외국어를 알수록 그는 더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사실 신비가의 작업에 쓸모가 없는 지식이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모든 수행자는 신비주의란 누구나 때가 되면 배울 수 있는 상식의 신격화이며, 또 모든 경험이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온 계시는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과신보다는 건전한 회의론 쪽으로 기우는 편이 훨씬 낫다. 평범하고 명백한 물질차원의 설명이 가능한 일에도 뭔가 신비로운 설명을 구하고자 애쓰는 것은 결코 찬양할 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의무는, 언제나 자신의 내적 균형을 유지하며 결코 자신에 대한 지배력을 잃지 않으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려고 애쓰는 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전보다 더 바람직한 신지학자, 더 지혜로운 신비가, 그리고 더 쓸모 있는 원조자가 될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이 자연계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능력에는 혼자서 마음대로 기록을 조사할 수 있는 달인으로부터 간혹, 혹은 일평생에 단 한번 매우 희미하게 흘깃 보는 정도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다양한 단계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능력을 단지 부분적으로, 혹은 간헐적으로 지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매우 흥미로운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과거를 다시 현실 속으로 불러내기 위해서 물질차원의 관계가 있는 물체를 필요로 하는 탐흔능력이든, 이보다 덜 확실한 아스트럴 망원경으로 오랜 역사 속의 장면을 들여다보는 수정구 투시자이든 간에 모두가 각자의 능력을 통하여 한량없는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설사 그들이 그러한 결과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지를 언제나 이해하고 있지는 못할지라도, 또 그 능력을 어떤 상황에서나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능력이 저차원적으로 나타나는 많은 경우,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난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수정구 투시자들이 과거의 장면들을 보면서도 그것을 현재의 비전과 구별해내지 못한다. 약간의 영적인 소질이 있는 많은 사람들은 어떤 광경들이 끊임없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을 발견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주변의 여러 가지 물체들에 접근하거나 건드리게 될 때 사실상 자신이 그것을 탐흔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이런 형태의 영능자(Psychics) 중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예는 대부분의 경우와는 반대로 무생물 대상보다는 사람만 탐흔 가능한 사람의 경우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 능력은 변덕스럽게 나타난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영능자는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종종 그의 인생의 어떤 특별한 사건을 불현듯이 보게 되기도 하지만 그와 비슷한 다른 경우에는 또 전혀 아무런 인상도 받지 못하기도 한다. 이보다 드물기는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그 과거를 소상하게 투시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형태의 가장 모범적인 예는 아마도 독일의 작가인 초케(Zschokke)일 것이다. 그의 자서전에는 그가 발견한 자신의 신비한 능력이 소개되어 있다. 




그 능력은 전혀 낯모르는 사람을 처음 만날 때 가끔 나타났다. 내가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지나간 삶이 그 속의 몇몇 특이한 장면 중의 여러 가지 소소한 상황들과 함께 마치 꿈처럼 눈앞에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무의식중의 일이며 분명히 단 몇 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이것을 내가 환상에 빠져 헛것을 본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꿈과 같은 광경이 계속해서 관련된 자들의 의상과 행동, 방안의 모습과 가구들, 그리고 다른 사건의 장면들을 보여줄수록 그 생각은 더해갔다. 그런데 한 번은 가족들과 가벼운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얼마 전에 그만두고 나간 여자 재봉사의 비밀스러운 내력을 읽어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그 사람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들 놀라 웃으면서 내가 그 사람의 내력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믿으려들지 않았다. 내가 한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꿈과 같은 광경이 현실과 일치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상대방에 대해 좀더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실례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한 자주 과거의 장면이 내 눈앞에 지나간 사람에게 그 내용을 이야기해 주고 그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해 보았다. 그때마다 상대방은 경악을 감추지 못하며 사실임을 시인했다. 

어느 맑은 날 나는 아직도 생존해 있는 두 사람의 젊은 삼림관과 함께 발트슈트라는 마을에 갔다. 그때는 저녁이었고 걷기에 지친 우리는 ‘포도나무’라는 이름의 선술집에 들어갔다. 우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동식탁에 앉아서 저녁을 먹었는데 그들은 메스메리즘이나 라바터의 관상학체계 따위를 믿는 스위스 사람들의 별난 습성과 단순함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단순함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들의 조롱에 민족적인 자부심이 상한 내 친구 중의 하나가 나를 보고, 특히 우리 맞은 편에 앉아서 우월감에 찬 표정으로 조롱의 빛을 감추지 않는 젊은 친구에게 뭐라고 논박을 좀 해주라고 했다. 

그때 마침 그 친구의 과거가 내 마음 속에 지나갔다. 나는 그를 향해, 그가 나를 모르듯이 나도 그를 모르는 고로 만일 내가 그의 알려지지 않은 과거의 사실을 말한다면 솔직히 대답해줄 수 있겠는지를 물어보았다. 나는 그것은 라바터의 관상학 기술보다는 좀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만일 내 말이 진실이라면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솔직히 시인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래서 나는 내 앞에 지나간 장면 속의 사건들을 읽어 내려갔고, 식탁에 앉은 사람들은 그 젊은 소매상인의 학창시절과 그의 사소한 그릇된 행위들과 드디어는 그가 주인의 돈을 훔친 행위에 이르기까지 그의 편력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아무도 없는, 벽이 흰 방의 갈색문 오른쪽에 탁자가 있고 그 위에 검은 금고가 놓여 있었다는 등의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 친구는 매우 놀란 표정으로 내가 맞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방안의 상황까지 모든 이야기가 정확하다고 시인하였다. 




이 사건을 이야기하고 나서 명사(名士)인 초케는 자신이 그처럼 자주 보여준 이 모든 놀라운 능력이 정말 단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조용히 제기한다. 




과거를 돌이켜보는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 방면의 문헌에서도 비교적 찾아보기가 드문 편이므로 그것은 예지능력보다는 훨씬 드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과거를 투시하는 능력은 그 의미를 인식하기가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 장면 속에 갑옷이라든가 옛날의 복식과 같은 특별히 주의를 끄는 것이 눈에 띄지 않는 한 그것이 무엇인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과거의 장면을 보게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물론 예지능력 또한 늘 그 당시에 그 의미가 인식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예지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면 그와 동시에 그 예지가 생생히 기억되므로 그것은 잊혀진 채 간과될 가능성이 적다. 그러므로 아카식 레코드의 아스트럴적인 투영을 간혹 일별하는 예는 우리가 문헌을 통해서 믿고 있는 것보다는 더 흔할지도 모른다.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접속자집계

오늘
4,998
어제
5,765
최대
6,218
전체
1,315,265

그누보드5
Copyright © woojunamu.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