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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 [천계] 천계의 삶을 포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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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2,299회 작성일 16-08-02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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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093, Vote: 16, Date: 2005/03/09 16:20:39
글 제 목 [천계] 천계의 삶을 포기함
작 성 자 문성호




5) 천계의 삶을 포기함 


사람이 진보함에 따라 그에게 오는 보다 급속한 진보의 가능성 중에서 이른바 ‘천계의 보상에 대한 포기’라는 것을 신비주의 학도들이 안지 오래 되었다. 즉 물리계에서 일을 보다 신속하게 완수하고 돌아오기 위해 환생 중간에 있는 천계에서의 지복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인용구가 썩 좋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삶을 보상으로 보기보다는 지상의 삶의 필연적 결과로 본다면 그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도달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실존 과정에서 사람은 일정한 양의 영적인 힘이라고 설명될 수 있는 자신의 상위의 상념와 열망에 의해 움직인다. 이것은 그가 멘탈계에 이르는 때 그에게 반응할 것이다. 만약 이 힘이 조금밖에 없으면, 비교적 빨리 소진될 것이며, 하늘의 삶은 짧아질 것이다. 반면 거대한 양이 만들어졌다면, 상응하는 시공간이 그 충분한 작업을 위해 필요할 것이며, 천계의 생활은 매우 연장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이 발전되면, 천계의 삶은 더 길어지겠지만, 그것은 그의 진보가 그 때문에 지체되거나 그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은 아니다. 고도로 진화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는 천계의 생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열정이 재능으로 발전하고 경험이 지혜로 바뀌며 그렇게 성취된 영혼의 진보가 그가 모든 기간을 어떤 기적에 의해 물질계의 삶에 머무를 수 있게 될 경우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커지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천계의 조건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자연의 일반 법칙이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목적의 성취에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노력이 더 결정적이고 무섭게 좌절될 것이다. 즉 이것은 가장 고양된 지혜의 표현이라고 알고 있는 법칙을 합리적으로 적용하는 관점이 아니다. 

이 천계 생활의 포기 가능성은 결코 모든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대한 법칙은 궁극적으로 그에게 이로운 것이 확실하지 않다면 그리고 그렇게 될 때까지 그가 모르는 것을 맹목적으로 포기하고, 일반적인 진화 과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는다. 

일반 법칙은 지상에서의 삶 동안에 그것을 경험할 때까지 누구도 하늘의 지복을 포기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그가 그 계로 자신의 의식을 높일 수 있고 지상의 이해를 초월하는 영광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다시 기억해 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발전될 때까지 그러하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이유와 정당성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혼의 진보이기 때문에 천상의 지복을 희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자신의 계에서 알고, 자신의 하위 자아를 자기 결정과 일치시켜 행동하도록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색계 수준에서 하늘의 지복을 누리는 것은 비록 그것이 에고에 속한다 할지라도 단지 그의 인성자아를 통해 현현된 것으로 그에게 속하기 때문에 엄격하게 정당한 것이라고는 거의 볼 수 없다. 하위 수준의 천계에서 행해지는 것은 모두 개인적으로 익숙한 환경과 더불어 그 개성의 삶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포기하기 전에 그 개성이 포기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하위 마음은 이 주제에 대해서 상위 마음과 일치해야만 한다. 

그러한 깨달음에는 문제의 개인이 사후에 갖게 될 멘탈계 의식과 동등한 의식을 지상의 삶 에서 지닌다는 것이 분명히 포함된다. 그러나 의식의 진화가 말하자면 아래에서 위로 일어난다는 것, 그리고 상대적으로 덜 발전된 인류의 다수는 아직까지는 육체에 머물러 있어야만 효과적으로 의식을 지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아스트럴체는 대부분 여전히 형체가 없으며 조직되어 있지 않다. 즉 그것은 에고와 육체 사이를 소통시키는 다리이고 감각의 수용을 위한 매체이지만, 진정한 인간이 장악하거나 미래의 권능을 그 계에서 정확하게 표현하는 도구는 결코 아니다. 

보다 진보한 인류의 종족들 사이에서 우리는 훨씬 더 발전된 아스트럴체를 발견한다. 또한 그 속에 담긴 의식은 대부분 잠재적으로 매우 완전하다. 대개의 경우 그때에도 인간은 전적으로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의 상념을 주로 의식하고 자신의 실제적인 환경에는 별로 의식적이지 못한다 해도 그렇다. 진보하기 위해서 신비주의를 연구해 왔던 몇몇 사람은 그 계에서 균형있게 깨어나고 있으며, 그래서 자신의 아스트럴 능력을 완전히 사용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여러 가지로 큰 이득을 얻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이 처음부터 또는 심지어 어떤 상당한 시간 동안 물리계 상에서 자신들의 아스트럴적 삶의 활동과 경험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부분적으로 이따금 그럴 때가 있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이유로 그 상위계의 생활 중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것도 육체의 두뇌 속으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물론 멘탈계에서의 명확한 의식은 진보가 훨씬 더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 주지만, 정상적이고 규칙적으로 발전되는 사람의 경우에 우리는 아스트럴체와 육체 사이의 연결이 매우 잘 이뤄지는 때에만 그러한 의식이 나타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문명이라는 일방적이고 인공적인 조건에서 항상 규칙적이고 정상적으로 발전되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 멘탈계에서 상당한 의식이 획득되어 아스트럴적 삶과 적절하게 연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상위계에서의 생활에서 경험한 어떤 것도 육체의 두뇌 속으로 전혀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틀림없이 존재하며 거기서 우리가 갖고 있는 규칙에 한 가지 예외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유형의 인성자아는 천계의 형언할 수 없는 축복을 맛보고 그래서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을 정도로 충분히 진화했을지도 모르는 반면에, 그 기억을 아스트럴계의 삶까지만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러나 아스트럴적 삶이 그 개성에게는 완전하고 완벽한 의식 상태가 될 것이라고 가정하면, 이 모든 경험들의 일말의 흔적도 물리적으로 깨어 있는 의식을 통과하지 않는다 해도 그러한 기억은 공평함이라는 필요조건을 충족시킬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기억해야 할 핵심은 포기해야 할 것이 개성이기 때문에 경험해야 할 것도 또한 개성이며, 그 개성은 정상적으로 그리고 완전 의식 상태로 작용하는 어떤 계로 기억을 되돌려야만 한다. 그러나 이 조건들이 아스트럴계에서 충족된다면 그 계가 물리계일 필요는 없다. 그러한 경우는 이미 적어도 지혜의 대사들 중 한 분의 견습제자들이었던 자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발생하기 힘든 경우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최상의 성실함으로써 스스로를 세상의 조력자들의 손길에 가치 있는 도구로 만들어야 한다. 즉, 그는 타인들의 영적인 이익을 위해 매우 헌신적인 열정을 갖고 고된 작업에 스스로를 내던져야 하며 스스로 위대한 영광을 받을만하다고 거만하게 생각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그의 마스터가 한 두 생의 노고 뒤에 그에게도 가능성이 있는 시간이 왔다고 말해줄 수 있기를 겸허하게 희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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