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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 (블라바츠키, 포웰)

멘탈체 [멘탈체] 17.관조

작성일 16-07-31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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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우주나무 조회 9,30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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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장 

관조(觀照) 




관조(Contemplation)는―우리가 이미 두개를 다룬―세 단계 중 세 번째이다. 세 단계란: 

(1) 집중Concentration. ― 주의를 하나의 대상에 고정하는 것 

(2) 명상Meditation. ― 단지 그 대상에만 관련해서 의식을 활동하게 하는 것: 즉 가능한 모든 관점에서 그 대상을 보고, 그 의미를 통찰하고 새롭고 깊은 상념에 도달하거나 그 대상에 대한 직관적인 영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 

(3) 관조Contemplation. ― 의식의 저차원적인 활동들이 성공적으로 억압되는 동안, 의식을 그 대상에 활발하게 집중하는 것: 받아들인 영감(light)에 잠시 동안 주의를 고정시키는 것. 그것이 사고(思考)나 명상의 (계통의) 절정에서 집중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 

힌두 용어에서 그 단계들은 다음과 같이 더 자세히 설명되고 이름이 붙여져 있다. 

(1) 프라티야하라Pratyâhâra: 감각들의 완전한 통제를 포함하는 예비적인 단계. 

(2) 드하라나Dhârâna: 집중(Concentration) 

(3) 드햐나Dhyâna: 명상(Meditation) 

(4) 사마디Samâdhi: 관조(Contemplation) 

드하라나, 드햐나와 사마디는 묶어서 산냐마Sannyama로 알려져 있다. 
명상할 때, 우리는 대상과 함께 여러 가지를 관련지어 보거나 또는 비교해서 대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발견한다. 우리는 대상에 관하여 더 이상 추리하고 논할 수 없을 때까지 이 추리 및 논의 과정을 계속한다: 그 다음에는 주의를 그 대상에 활발하게 기울인 채로, 모든 비교하는 것과 논하는 것을 중지하고 우리에게는 그 대상을 둘러싸는 것 같은 무한(indefiniteness)을 통찰하려고 애를 쓰면서, 그 과정을 억제한다. 이것이 관조이다. 

초학도는 명상이 일생을 요하는 하나의 학문(기술)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며 그러므로 그는 초기의 노력에서 순수한 관조의 단계에 도달하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관조란 사고자와 대상이 하나가 되도록, 의식을 한 대상에 유지하여 그것을 자신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또한 묘사될 수도 있다. 

잘 훈련된 마음이 잠시 동안 한 점의 상태(onepointedness)나 집중을 유지할 수 있고, 그 다음에 주의를 어떤 것에도 기울이지 않고서 고정된 주의를 유지하면서 그 대상을 버릴 수 있을 때 바로 그때 관조의 단계에 이른다. 

이 상태에서, 멘탈체는 어떠한 영상image도 보여주지 않는다. 멘탈체 자신의 구성 물질(materials)은 어떠한 인상도 받지 않으면서 차분하고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며 고요한 물같이 완벽하게 조용한 상태로 유지된다. 이 상태는, 화학자가 말하는 “임계(臨界)” 상태 즉 물질의 두 상태 사이의 (변형)점과 같이 아주 짧은 기간 이상은 지속될 수 없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면, 멘탈체가 고요하게 될 때, 의식은 멘탈체로부터 벗어나 “라야 센터(laya centre)” 즉 멘탈체와 원인체 사이에 있는 중간 접촉점들에 들어가고 나온다. 

이러한 의식의 이전(移轉)은 일시적인 기절 혹은 의식 상실을 수반한다. 이는 의식의 대상이 사라짐으로 인하여 초래되는 피할 수 없는 결과로, 그 뒤에 의식이 상위의 체에서 작용하게 된다. 하위 계들에 속하는 의식의 대상들을 내어 버리게 되면 이렇게 상위 계에서 의식의 대상이 뒤이어 나타나게 된다. 

그때 자아는 자기 자신의 고상한 상념들에 따라서 멘탈체를 형성하고 자신의 진동들로 멘탈체를 충만하게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계보다 훨씬 더 높은 계들에 대해서 얻은 광경들(visions)을 모방해서 멘탈체를 만들 수 있고, 이리하여 하위의 의식에다가, 모방하지 않았다면, 멘탈체가 반응할 수 없을 개념(관념)idea을 전달할 수 있다. 

이것들이, 현란한 빛으로 마음속에 번쩍거리며 들어와서 하나의 세계를 비추는 천재의 영감(靈感)들이다. 세계에 영감들을 전달하는 바로 그 사람 자신도 일반적인 멘탈 상태로는 어떻게 그것들이 그에게 도달했는지를 거의 알 수 없지만 약간 다른 방식으로 알고 있다. 

“...내 속에서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능력이 
나의 입술에 살아 있고 나의 손으로 손짓한다.” 

모든 교리와 모든 시대에 있어서 성인들의 절정(황홀경)과 환상들도 또한 이러한 성질의 것이다; 이들 경우에서는 오랫동안 몰입하는 기도나 관조가 (이러한 현상들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두뇌의 상태를 낳았다. 감각들이 전달되는 길들은 강한 내적인 집중에 의해 폐쇄되었고 라자 요가 수행자가 심혈을 기울여 도달하려고 애쓰는 것과 똑같은 상태에 가끔씩 무의식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명상에서 관조로의 이전은 “씨앗을 가진” 명상으로부터 “씨앗을 가지지 않은” 명상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그것은 사슬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논쟁에서 마지막 연결 고리에 해당하는 추론의 최고 지점이나 전 (추론) 과정의 중심 상념이나 형상figure위에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이 씨앗을 가진 명상이다. 

그 다음에 학도는 여전히 마음을 얻어진 위치(상태) 즉 도달한 최고의 지점에서 활기차고 (방심하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모든 것들로 하여금 흘러가게 내버려둔다. 그것이 씨앗이 없는 명상이다. 침묵과 텅빔 속에서 기다리며 평형의 상태로 계속 있을 때, 그 사람은 “구름(cloud)”속에 있다. 그때, 갑자기 하나의 변화가, 분명하고 불가사의하며 믿을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해탈(illumination)로 이끄는 관조이다. 

이리하여, 예를 들면, 한 매스터의 영상을 형성한 후, 이상적인 사람인7 그 매스터에 관한 관조를 실행할 때, 자신을 그 영상의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채우면서 학도는 황홀하게 그 영상을 응시한다. 그리고 나서 매스터를 향하여 자신을 높이려고 애를 쓰면서 그는 자기의 의식을 이상적인 사람에게 고양시키고 그 속에서 흡수되어 그와 하나가 되려고 노력한다. 

위에서 언급된 일시적인 기절은 산스크리트어로 다마-메가(Dharma-Megha),즉 의(義)의 구름이라 불린다. 서구의 신비주의자들은 그것을 “산 위의 구름(Cloud on the Mount)”, “성소의 구름(Cloud on the Sanctuary)”, “자비의 보좌의 구름(Cloud on the Mercy-Seat)”라 부른다. 그 사람은 홀로 있지는 않지만 (무엇인가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자욱한 안개에 둘러싸인 것처럼 느낀다. 곧 구름은 엷어지고 그 다음에 상위 계의 의식이 점점 분명해진다. 그러나 그 전에, 그 사람에게는 바로 자신의 생명이 고갈되고 있는 것 같고, 그가 큰 어둠으로 가득한 텅 빈 곳에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외로이 덩그러니 매달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침묵과 고요함 속에서 “고요히 하고 내가 하나님임을 알라(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라는 자아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고, 자아의 영광이 보일 것이다. 구름은 사라지고 자아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명상에서 관조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기 전에, 바라고 희망하는 것은 적어도 수련기간 동안에 전적으로 포기되어야만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카마Kama(욕망)는 완벽하게 통제되어야 한다. 원하는 것들이 마음을 차지하는 동안에, 마음은 결코 혼자가 될 수 없다; 모든 바램은 분노, 불성실, 불순함, 분개함, 탐욕, 부주의함, 불만, 나태, 무지 등등이 생기는 씨앗(근원)이다. 하나의 바램이나 희망이라도 여전히 남아 있는 동안, (진리의) 법칙을 이렇게 위반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다. 

바라는 것들, 충족되지 않은 것들이 존재하는 한, 그것들은 사람의 주의력을 분산시킬 것이다; 상념의 흐름(물결)은 언제나 충족되지 않은 욕망들과 우유부단한 사고에 의하여 열려 있는 조그만 협곡들과 수로들 속으로 이탈해서 흐르기를 원하고 있다. 모든 충족되지 않은 욕망, 모든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굶주린 입이 음식을 찾듯이 주의를 끌려고 한다: 일련의 상념이 어려움을 만날 때 이들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한쪽으로 방향을 튼다. 방해를 받은(중단된) 상념의 사슬들을 찾아내면, 충족되지 않은 욕망들과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 발견될 것이다. 

의식적인 활발함이, 어떤 것의 고유 속성(nature)과 계에 속하는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일반적인 활발함에 대해서 직각들을 이루며 나아가기 시작할 때 관조 과정은 시작된다: 그러한 움직임은 그것이 존재하는 계들을 (칼로 자르듯이) 가로지르며 보다 정묘한 내부의 속성 속으로 뚫고 들어간다. 비교하는 활동들에 의하여 주의가 부분 부분들로 더 이상 나누어져서 분산되지 않을 때, 회전하는 팽이가 매우 급속하게 움직이는 상태에서 정지된 상태로 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처럼, 마음은 전체적으로 움직이고 아주 고요한 것 같을 것이다. 

관조할 때 사람은 대상에 관하여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자아와 대상을 서로 관련된 두개의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관념(생각)을 감정으로 물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초연의 지점에 도달하여 관조는 바로 대상의 내부로부터 시작할 수 있고, 동시에 멘탈적인 열정과 에너지가 모든 상념의 노선을 따라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을 행해야 한다. 의식은, 하늘에 날개를 펴고 있는 새처럼, 앞을 내다보고 결코 뒤돌아 설 생각을 하지 않고서 균형을 유지해야만 한다. 

관조할 때 상념은 내부로 들어가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까지 이르게 된다: 비록 무엇인지는 명확히 포착할 수 없지만 뭔가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 뒤돌아가거나 한쪽으로 돌이키지 않고, 상념은 그 위치에 지속적으로 머물고있다. 이 관조에서는, 물론, 잠이나 멘탈적인 무활동의 성질을 띠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어떤 강한 탐구열 즉 시력이 정상적으로 뚜렷하고 정확하게 유지되는 의식적인 활동이 작용하는 일반적인 하위 영역들에 내려가지 않고, (무한한 속성의) 명확하지 않은 것(indefiniteness) 속에서 명확한 어떤 것을 보기 위한 지속된 노력이 있다. 

헌신가는 유사한 방식으로 관조를 실행할 수 있지만, 그의 경우에 활발한 것은 상념(사고)이라기보다는 감정이다. 

자기 자신의 내부 속성(본질)nature에 관하여 관조할 때, 학도는 외부의 여러 체들 및 마음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일체성을 거부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서 속성들을 제거하지 않고 한계들(limitations)을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이) 벗겨 낸다. 마음은 몸보다 더 신속하고 더 자유롭다. 그리고 영은 마음을 능가하는데 그것은 훨씬 더 자유롭고 더 신속하다. 사랑은 어떠한 외부적인 표현에서 보다 마음의 고요함 속에서 더욱 가능하지만, 마음을 능가하는 영에서는 사랑은 신성하게도 확실하다. 이성과 판단은 감각들의 앞뒤가 맞지 않는 (비뚤어진) 증거를 언제까지나 바로 잡는다: 영의 시야는 감각 기관들이나 마음 없이 진리를 식별한다. 

이러한 수련들의 모든 단계에 있어서 성공의 비결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충만한 의식적인 에너지의 흐름을 유지하는 동안에 저차원의 활동들을 차단하라. 첫째로, 하위의 마음은 활기를 띠고 깨어 있어야만 한다; 그 다음에 그 마음의 활동은 (그 마음의 활동에 의해서) 얻어진 힘(충동)impetus이 내부에서 고차원의 기능들을 단련시키고 개발하는데 사용되는 동안에는 차단되어야 한다. 

고대의 요가학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사고하는 마음의 과정들이 적극적인 의지에 의하여 억압될 때, 상념이 욕망들을 초월하여 그들 가운데서 선정하고, 욕망들이 특별한 행위들과 노력들을 자극하는 것처럼,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이 일반적인 사고 작용(thinking)을 초월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새로운 의식 상태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탁월한 의식 상태는 하위의 마음(lower mind)으로서는 묘사될 수 없지만, 그 상태를 달성하는 것은, 모든 교양 있는 사람들이 신체가 활동하고 있을 때조차도 자신들이 신체가 아니라고 인식하는 것과 똑같이, 멘탈 활동이 진행 중 일지라도 사람은 자기가 마음과 상념을 넘어선 어떤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대상들을 식별하고 비교하며 원인(결과)적인 관계를 찾아내는 심혈을 기울이는 과정들을 가진 마음을 벗어난 또 하나의 존재 상태, 아니 이보다는 오히려 생명에 대한 또 하나의 살아 있는 개념이 존재한다. 그 높은 상태는 의식의 활동들이 모든 세속적인 열정과 활기 속에서 그들이 정상적으로 거주하는 더듬는 동굴 생활(groping cave life)을 벗어나게 될 때만 실현될 수 있다. 그 높은 의식은 조만 간에 모든 사람들에게 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올게 될 때 모든 생활(생명)이 갑작스럽게 변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명상을 함으로써 학도가 영적인 경험을 풍성하게 함에 따라, 그는 의식의 새로운 국면들이 이렇게 점진적으로 그의 내부에서 열리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불타는 열망으로 그의 이상에 집중할(fixed) 때, 그는 곧 자신에게 빛을 비추는 이상의 영향을 의식하게 될 것이고, 그가 헌신의 대상에 도달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할 때, 잠시 동안 바로 하늘 자체의 문들floodgates이 열리고 자신이 그 이상과 하나가 되고 그것을 실현(체득體得)함으로써 나타나는 영광으로 가득한 것을 발견할 것이다. 보다 (유한 계의 틀에 맞추어진) 정형 적인 마음의 형태(형체)들을 초월한 후에, 높이 도달하려는 강한 노력이 행해진다. 그 다음에 인성(personality)의 제한들이 떨어져 나가고 분리의 모든 그림자가 대상과 추구하는 자의 완벽한 연합 속에 사라질 때, 바로 그러한 영의 황홀경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침묵의 목소리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너는 네 자신이 길 그 자체가 되기 전에는, 길 위를 여행할 수 없다...보라! 너는 빛이 되였고 너는 소리가 되었고 너는 너 자신의 스승과 신(神)이 되었다. 바로 너 자신이 네가 탐구하는 대상이니라; 끊임이 없는 목소리, 바로 그 목소리가 변화 없고 죄가 없이 일곱 목소리가 하나로 된 채로 영원들을 통하여 다시 울린다.” 

그러한 경험들을 더 묘사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지루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유한계의 틀로) 정형화된 말의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말이란, 순례자가 그의 발걸음을 어디로 향하게 해야 할지 알 수 있도록 말로 형언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것을 향한 길을 가리키는 길잡이로서만 용도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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